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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미학오디세이>를 읽고

 잔잔 2015. 8. 25. 17:09

 

 

처음 생각한 제목은 <내 생애 가장 ‘예술적인’ 일주일>이었다. 그런데 그 ‘예술적인’이라는 말에 내가 걸려 넘어질 것 같아서 그냥 영화 제목 그대로 적었다. 솔직히 이 영화를 보진 못했다.

 

1

2007년 6월 22일, 우리 반은 기말고사를 딱 일주일 남겨두고 디데이를 세고 있었다. 그 때, 학교에서 나는 반장과 최다지각생 그리고 자칭상담사를 맡고 있었다. 입학 후 1년간은 ‘학교 선생님’을 꿈꾸며, 착실히 공부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자 ‘학교 회사원’ 같은 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야자를 빼고 태권도 도장에 다녔다. 반장은 1학년 때 한 번 했더니 그냥 그대로 쭉 하게 된 거였고, 최다지각생은 집에서 학교 종소리를 듣고 나가는 재미에 빠져서 그렇게 되었다. 중요한 건, 자칭상담사다. 나는 ‘학교 회사원’ 같은 건 되지 않겠다고 말한 이후, 그럼 뭘 하면 좋을지 계속 고민했다. 그땐 어른이 되면 꼭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찾은 게 ‘상담(相談)사’였다. 서로 이야기하는 게 일이라니! 그러면서 친구들을 붙잡고 무슨 일이든지 나한테 와서 얘기하라고 했다. 처음엔 애들도 웃고, 나도 많이 웃었다. 우리는 학교옥상 올라가는 계단 끝이나 자율학습감독 눈이 안 닿는 복도 구석의 책상에 앉아 이야기 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면 나는 친구에게 처방이랍시고 사탕과 초콜릿, 쪽지를 담은 약봉투를 건넸다. 그러는 동안 2007년의 여름이 시작되었고, 학교 앞 벚나무들이 더 자랐다. 그리고 나는 상담소 이름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6월 22일은 아침부터 수첩을 들고 다니면서 좋아하는 낱말들을 적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름을 정했다. 저녁 먹기 3분전이었고 곧바로 종이 울렸다. 나는 기쁨에 겨워 수첩을 들고 교실을 뛰어 다녔다. 친구들은 그렇게 배가 고팠냐며 비웃었다. 우리는 밥을 받아 빙 둘러 앉았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기말고사 끝나고 상담소 이름 공개식 할거야. 드디어 정했다! 하하하.”

 

그때부터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 시작되었다. 이름 공개식은 기말고사가 끝나는 바로 다음 날인 7월 4일에 하기로 했다. 어떤 글을 준비해서 읽을까? 선언문? 상담소의 비전을 제시해야겠지? 밥은 뭘 먹을까? 아무래도 내가 직접 만드는 게 좋겠지? 어떤 옷을 입을까? 초대장은 누구누구한테 보낼까?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면서 나는 학교에 있지만 학교에 있지 않았다.

 

 

 

 

2007년 7월 4일, 수업이 끝나고 교실에 남아 친구들과 함께 이름 공개식을 했다.

그때 읽었던 글을 대충 요약하면 이렇다.

“앞으로 나는 청소년들과 함께 에너지를 나누는 다양한 일들을 할 것이다. 혹시 힘들다고, 그만 두겠다 하면 너희가 오늘을 기억하고 나를 혼내 달라. 그리고 여기 있는 너희들은 모두 나의 후원자니까 부디 멋진 사람들이 되어 달라.”

어쩌다보니 이름 공개식을 빙자한 “미래 후원자들을 위한 점심”이 되었다. 이날의 메뉴는 커다란 양푼 비빔밥이었다.

 

 

2

누가 나한테 예술이 뭐냐고 물으면 난 입만 달싹거리다 끝내 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난 예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땐 몰랐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게 예술이었다. ‘알지 못했’지만, ‘행했’던 원시인들처럼. 그들은 동굴 벽에 사냥할 동물을 그리면서, 그림속의 동물과 실제 동물을 구분 짓지 않았다. 나도 그 당시 일주일 동안 나의 미래를 계획하고 그리면서, 원시인들처럼 현실과 그것을 따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공간구조를 하고 있는지, 어디에 어떤 물건들이 놓여있는지 구체적으로 그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청소년들과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을 계획했다. 그리고는 나를 “곰꿈찌:(공간이름)지킴이”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을 보냈다.

 

그리고 졸업을 하고 대학에 다니면서, 나는 내가 만든 가상의 세계와 현실을 나눠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현실적인 요소들을 점차 알아갔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에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나와 생활해보니 정말 뚜렷하고 구체적인 현실이 보였다. 원시인들에게 ‘주술로서의 예술 혹은 마법시대’가 끝나간 것처럼 나 또한 그랬다. 당혹스러웠지만, 차츰 정신을 차리고 나는 내가 처음 그렸던 미래와 ‘상사(相似)’한 다른 일들을 해나갔다. 고등학교 후배들의 멘토활동, 복지관에서 하는 방과 후 교실, 초등학생들을 위한 텃밭 교육, 이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네팔의 한 친구 학교 보내주기 등등. 똑같이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거였지만, 방법은 다양했다. 정말 ‘천 가지의 방식으로 펼쳐지는 세계’였다. 그러나 당혹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전공공부를 하면서도 삶에 대한 나의 당혹감은 풀리지 않고 한 쪽에 남아 있었다. 고3 때, 나는 “교육심리학과”에 가면 나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또 1년이 지나자 의문이 들었다. 나는 검사와 분석, 평가와 분류, 통계 등을 거쳐 청소년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1년 반 동안의 전공공부는 내게 그런 과정과 느낌을 전해주었다. 물론 나는 아직 충분히 공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느 날 학교 선생님이 회사원처럼 느껴지던 순간과 비슷했다. 그래서 도망쳤다. ‘모든 것을 동일화하는 폭력으로부터의 탈주’가 아니었다. 나는 그 ‘폭력’으로부터 도망쳤다. 처음 학교 선생님이 되지 않겠다고 했을 땐 뭔지 모를 자신감이 있었다. ‘탈주’라고 자신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엔 두려웠다. 나는 자꾸 그럴싸한 핑계를 대고 도망 다니기 바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학교 선생님이라고 해서 모두 회사원 같진 않다. 그들 중에도 분명히 다른 선생님이 있다. 그런데 나는 다른 선생님이 되길 시도해보려고 하지 않고 바로 그만두었다. 나한테 묻고 싶다, 그 ‘폭력’ 에서 저항할 순 없을까? 개인적으로 뒤샹의 <샘>이 뉴먼의 <하나-성>보다 더 꽂힌 건, 아마 뒤샹은 그 ‘폭력’ 안에서 저항했다고 생각해서가 아닐까싶다. 저항과 탈주는 똑같은 의미를 같지만, 미묘하게 다른 것 같다. 뉴먼의 작품은 ‘폭력’ 으로의 탈주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내 삶을 비관하는 건 아니다. 도망이었든 탈주였든 중요한 건 그 다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망치고 혹은 탈주하고 그리고 무얼 할 것인가? 그게 문제다. 뒤샹이랑 뉴먼은 그리고 뭘 했을까? 아마도 생각건대, 그들의 저항과 탈주는 전시를 통해 그냥 그 자체가 다른 것들을 생성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촉발을 했을 것이다. 이 지점이 예술이 멋있어 보이는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술이 삶보다 위에 있다는 건 아니다. 삶도 얼마든지 이런 지점들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찾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제 무얼 할까. 그렇지만 그 문제에 너무 집착하진 않으려고 한다. 디오게네스의 제안에 매혹됐기 때문이다. 꿈이든 참된 세계든 지금 여기서 친구들과 함께 진짜로 놀아보고 싶다. 그 문제 너머에서 즐겁게 놀다보면, 피타고라스나 뒤러의 멋진 하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3

예술과 삶은 결국 같은 거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또 “예술은 삶이다”와는 좀 다르다. 어떻게 다른지 얘기하고 싶은데, 아직 설명하지 못 하겠다. 그래서 세미나에서 함께 공부한 미학과 예술에 관한 것들을, 내 삶에서 찾아보려고 했다. 어쩌면 억지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내 삶도 예술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사실 그것도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별(멀리 있고, 얘기할 수 없고, 차갑고, 반짝거리는)처럼 느꼈던 예술을 좀 더 가까이 내 안으로 끌어당겨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내 안에서 작은 불을 피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추위를 녹이고 갈 수 있게.

 

예술 작품과 주체의 삶을 연결 짓는 일이 근대미학의 한계라고 했지만, 나는 좋다. 엄밀히 말하면, ‘연결 짓는’ 게 좋은 게 아니라 ‘예술 작품’ 그리고 ‘주체의 ’이 좋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예술도 되고, 또한 동시에 삶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계속 예술과 삶을 동시에 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