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여울 방/사진첩

아프면서 자란 생각 (내가 바라는 노후대책)

 잔잔 2016. 6. 2. 12:07

 

이음이와 여울이가 아플 때 나는 감각을 곤두세운다. 체온의 변화, 콧물의 색과 흐르는 빈도, 기침의 얕고 깊음과 횟수, 손,발의 온도와 굳기(!) 등을 살피고 챙긴다(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 '무심한듯' 살펴야 한다는 것. 왜냐면 아이들은 엄마의 감정을 따라가기 쉬워서. 내가 너무, 아이고 큰일났다, 또 아프네, 그러면 아이들도 그렇게 느끼기 쉬우니까. 무심한듯 살피고 챙겨야 한다. 근데 그게 잘 안될 때가 있다휴). 그러다 아이들이 다 나을무렵 내가 옮아 고생하고 종당엔 셋이 돌아가면서 아프고 나서야 한 번의 감기가 맺음지어진다. 다이어리 기록을 보니, 두달에 한번꼴로 오던 감기가 올 1월부터 월례행사마냥 매달 한차례씩 찾아왔다. 길게는 보름을 셋이서 돌아가며 앓았다. 그 시간들 속에서 참 여러가지 실험(!)을 해보기도 하며 자라난 생각들을 기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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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나는 병원에 잘 가지 않았다 불신감이랄까.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의사-환자 관계를 맺어보지 못한 내 탓일 수도 있다. 종종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갈때마다 그 불신감은 깊어만 갔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의사는 '갑'이었다. 의학적 전문지식이란 권력을 가지고 아픈 환자들에게 은근한 갑질을 하는 의사들을 마주했다. 그러면 '을'인 환자들은 숙이고 들어가 그들이 권고한 치료를 받고 약을 복용한다. 내가 내린 지시 외의 다른 질문은 받지 않으며 더 이상의 설명도 없다, 그런 느낌. 더불어 아픈 내 몸에 관한 것인데 어쩌면 나는 이렇게 하나도 알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 씨름해야하나 그런 고독감이랄까. 

결국 나는 병원에 발길을 끊었다. 다행히 아픈데없이 지냈다. 그러다 이음이를 가지고 나서 나는 다시 을이 되어 산부인과에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쌩쌩이 가져온 <폭력없는 탄생>을 함께 읽고 우리는 조산원으로 향했다. 이음이와 여울이는 병원이 아닌 조산원의 어둡고 따뜻한 방안에서 조용히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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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이는 12개월 완모를 하고 바로 밥을 먹었다. 모유수유가 끝나자 감기와 결막염 등 잔병들이 찾아왔다. 한의학을 공부하고 있던 친구에게서 받은 <자연주의 육아백과>를 보며 감잎차와 배미음을 먹이며 감기를 이겨내보고 싶었지만 모든게 처음인 엄마에게 아이의 작은 기침소리와 열은 무섭게 다가왔다. 병원에 가자. 집에서 가까운 지점의 소아한의원문을 두드렸고 결국 아프면 달려갔다. 아이들이 먹기 쉽게 만든 한방감기약들이 증상별로 알록달록 예쁜 포장지에 싸여 나왔다.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한번 아파 가면 5-6만원. 부담이었지만 자주 아픈 건 아니었기에 다녔다. 그리고 여울이가 태어났고 둘은 꼭 함께 아팠다. 그리고 전보다 자주 아프기 시작했다. 여울이는 백일이후부터 감기에 걸렸다. 형에게서 옮았기 때문이었는데 둘이 아플때면 잠을 못잤다. 그래도 소아한의원에서 치료를 받고 약을 먹으면 일주일안으로 나았다. 하지만 둘이 되니 비용은 더욱 부담이 되었다. 



2

제작년 가을에 진안에 내려갔다가 우연히 청년귀농귀촌캠프에서 자연치료를 공부하시는 선생님 한 분을 만났다. 짧은 수업을 듣고 용기를 냈다. 아이들 몸이 가진 스스로의 힘으로 감기를 이겨내도록 돕자. 이사를 한 후엔 가까이에 소아한의원이 없기도 했기에 그것은 선택이라기보다 사실 어쩔수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몸과 맘이 지쳐있던 나는 작년1월부터 5월사이에 감기에 걸린 아이들을 데리고 양방병원에 다녔고 항생제와 해열제를 먹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계속 감기를 달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다. 그리하여 작년여름부터 지금까지 왠만하면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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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자연주의 육아백과>, <니시건강법> 그리고 온라인 사이트 '수수팥떡'의 자료들을 참고하며 하나하나씩 해보았다. 겨자찜질, 사혈침, 각탕, 족탕, 죽염가글, 풍욕, 추나요법...

우선 감기에 걸리면 먹는 것을 권하지 않았다. 이음이의 경우 아프면 스스로 잘 먹지 않는다. 열이 날 경우엔 더더욱. 대신 포도즙과 감잎차를 준비해 원할때마다 마시도록 했다. 그리고 손발을 계속 주무르고 마사지 해준다. 애기였을때부터 자주 만져줬는데 아플때는 손과 발바닥의 굳기가 다르다. 더 딱딱하고 뭉쳐진 곳도 느껴진달까. 그런쪽들을 자주 풀어준다. 또 한밤중에 열이 39도를 넘어서면 사혈침을 놓기도 했다. 감기로 인한 열은 대부분 40도 아래. 혹 열이나면서 축 쳐지거나 하면 병원에 가자, 라고 규칙을 정했다. 처음엔 무서웠지만 이젠 익숙해졌다. 귀를 반으로 접어 제일 높은 곳의 뾰족한 부분에 톡. 그리고 나서 조금 있으면 열이 떨어졌다. 그렇게 열이 떨어지고 나면 기침을 했다(몇번더해보니 열이 떨어지고나면 한기가 들지 않게 목에 수건을 둘러주는 게 기침을 덜하게 한다는 걸 알았다). 배숙을 만들어 먹이기도 하고 목과 가슴, 등에 겨자찜질을 해보기도 했지만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음이는 얕은 기침을 하다가 항아리기침을 했다. 그래서 풍욕을 해보았다. 시간과 방법을 따라 낮에 한 번, 잘 때 한 번씩 해주었는데 항아리 기침이 나았다. 가슴과 배, 등을 부드럽게 문질러주거나 쓸어주면 곧잘 가래를 뱉어내기도 했다. 겨자찜질과 각탕은 내가 잘 못해서인지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것들은 두어번 하다 그만두었다. 

그리고 감기가 올랑말랑 할때나, 미세먼지가 많은 날엔 죽염가글과 비강세척을 해주었다. 아이들은 코로 물을 마시는 게 어려우니 면봉에 죽염수를 묻혀 콧속을 닦아주었다. 죽염수가글은 정말 효과가 좋은 것 같다고 느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배도라지청을 한티스푼씩 먹이고 있다. 



(순성장거중에 묵었던 빈집에서 코를 훌쩍이며 차를 마시는 이음이)


(다먹은 배도라지청통에 물을 섞어 마시는 여울이)


(겨울감기필수템 조끼와 목수건을 하고 감잎차를 마시는 이음이)


(소아한의원에서 타온 달콤한 약을 쭉 짜먹고 있는 여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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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6월부터 올 5월까지 9번 정도 감기를 앓았다. 그 중 수족구, 독감도 있었고, 폐렴초기증상으로 입원하기도 했다. 1월이었다. 열이 나던 이음이가 좀 쳐지는 것 같아 쌩쌩과 함께 병원에 갔다. 폐렴기가 있다고 했다. 입원해야한다고. 통원치료를 하려고했으나 우선 열이 내릴때까지만 입원해 지켜보는 것이 좋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을 따라 입원했다. 입원해있는 동안 눈이 정말 많이 내렸다. 펑펑, 엄청나게 쏟아졌다. 그리고 쌩쌩마저 감기에 걸렸다. 


(처음 병원에 입원한 이음이손등에 링거바늘이 꼽힐때 눈물을 꾹 참았다. 왜그렇게 미안한 마음이 들던지..)


(아픈 형과 함께 지내며 덩달아 지친 여울이)




퇴원 후 집에 돌아오고 다음날 여울이 얼굴에 손발 여기저기에 두드러기가 나기 시작했다. 쌩쌩도 없었고 이음이는 지쳐있었고 여울이는 보채고 눈도 붓기 시작했다. 아. 어디로 가야하나. 나는 거의 망연자실했고 겨우 마음을 추스르며 나갈 준비를 해 집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을 향했다. 산책길에 자주 본 동네어르신들이 항상 붐비는 한의원이었다. 선생님은 장이 좋지 않은것 같다며 무심하게 사혈침을 여기저기 놓으셨다. 여울이는 돌아와 응가를 했고 두드러기가 차차 사라졌다. 그 뒤로 감기에 걸리면 둘을 데리고 집앞 한의원을 찾아 증상에 따라 여기저기에 사혈침을 콕콕 맞고 돌아온다. 약은 거의 안주신다. 좋은 열을 충분히 내고 나면 이겨낼 수 있다, 증상에 너무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러시면서. 그렇게 2,3,4월의 감기를 이겨냈다. 


그러다 또 4월 말 응급실에 갔다. 그땐 정말 놀랐다. 순간이었지만 진짜 무서웠다. 열경기에 대해 들어본적이 없었다. 열이 좀 오른 이음이가 뽀로로를 보다 갑자기 정신을 놓았다. 허공을 보기만 하고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대답하지 못했다. 너무 놀란 나는 이음이를 안고 쌩쌩에게 전화했다가 119에 전화했다. 이음이 입술이 파래졌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이음이를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바로 119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열경기는 수십초이내로 사라진다고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반듯이 눕혀놓고 정신을 차리면 소아과에 가보라고 했다. 쌩쌩이 금방 집으로 왔고 덜덜 떠는 이음이를 데리고 응급실에 갔다. 링거바늘을 꼽고 조금 누워있던 이음이가 정신을 차리고 엄마와 동생을 알아보았다. 아이들이 아파 병원에서 지내는 엄마아빠들을 존경하게 됐다. 

그 후로 이음이가 열이 나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지켜본다. 그 뒤로 두어번 더 열이 났지만 다행히 스스로 잘 이겨냈다. 옆에서 지켜보는 쌩쌩도 가끔은 나에게 너무 열심이라며 핀잔아닌 핀잔을 준다. 내가 병을 대하는 자세에는 동의하나, 가끔 나처럼 그도 그런 생각을 하나보다. 이렇게 해야하는 걸까. 이게 맞나. 어떤 방법을 믿는 게 아니고 스스로 이겨낼 아이들의 몸을 믿고 가고싶다. 다른 게 아니고 감기정도는 거뜬히 이겨내는 아이들이 되길 바라며 나는 열심이다. 이맘때 아이들은 본래 자주아픈데 그것들을 건강하게 앓으며 자라나기를.





5 그래서 결론은 의료사협.


그 사이에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겠지만, 이음이네 병력(medical history)을 길게 풀어 쓴 건 이 얘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년 겨울에 다큐3일에서 방송한 '우리동네 착한 병원'을 보게됐다. 안산 의료복지 사회적 협동조합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다. 의사도 환자도 모두 의료사협의 조합원이며, 조합원들이 출자한 돈으로 병원을 세우고 운영한다(또는 기존의 병원이 협동조합방식으로 운영을 전환할 수 있다). 환자와 의사의 권리와 의무를 모두 존중하며, 병의 치료도 중요하지만 예방을 위해 삶자체를 가꾸는 노력도 함께 하는 일종의 공동체였다. 병원에 커다란 빈공간이 있는데 건강소모임도 하고 건강강좌도 열린다. 신체건강을 위한 댄스팀뿐 아니라 정신건강을 위한 만들기 모임같은 것들도 있었다. 또 조합사업부에서는 독거노인들을 위한 봉사활동도 꾸준히 체계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점차 규모가 커져, 내과, 소아과, 치과, 한의원에 요양원, 방문요양, 왕진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안산의료사협이야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의료사협(의료생협)이 바로 도시에서 꾸려 갈 수 있는 현대사회의 노인공동체가 아닐까. 우리의 노후대책은 의료사협만들기에 걸어야 하는게 아닐까. 

의료사협은 노후대책으로서뿐아니라 다음세대들의 의료생활에도 중요한 배움을 전해줄 수 있다. 아플때면 바로 병원에 달려가 잘 알지 못하는 약과 의료시스템에 기대어 수동적인 자세로 자신의 몸을 대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건강하게 몸을 만들어 가며 살아가는 방식을 터득하게 될테니 말이다. 적다보니 이것은 정말 진정한 노후대책이다. 늙어 함께 할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동시에 다음세대에게 자연스럽게 좋은 것을 물려줄 수 있으니! 이러한 노후대책을 함께 시작할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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