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 방/공책

<흑산> 김훈

 잔잔 2016. 7. 16. 21:45

 

(김훈 장편소설 <黑山>의 속표지다. 김훈이 직접그린 '가고가리'라는 이름의 괴수. 먼 바다를 오고가는 새, 배, 물고기, 그리고 대륙을 오가는 말을 한마리의 생명체 안으로 모아 표현했다고 한다. 가고가리는 가고 또 간다)

 

 

 

5월부터 도서관에서 동화작가 김해등 선생님께 바다이야기꾼이라는 제목의 수업을 듣고 있다. 바다, 섬과 관련한 어마어마한 이야기들을 듣고 또 우리가 직접 이야기를 만들어보기도 하는 수업인데 , 뭐라고 해야할까, 재밌다. 재밌다기보다 적성에 맞는다고 해야할까. 재밌는 이야기도 듣고,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고, 내가 직접 써보기도 하고, 그림도 그려보고 등등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이 많은 수업이다.

 

그래서 요즘 머릿속엔 바다, 섬, 물고기, 섬사람들, ... 이런 것들이 둥둥 떠나닌다. 우연히 시민연대사무실에서 <흑산>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꺼내든 것도 그러한 연유때문. 안그래도 며칠전에 김해등선생님이 쓰신 동화책 <서울선님 정약전과 바다탐험대>시리즈를 읽고 난 터라 흑산도로 유배가는 정약전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첫 페이지부터 왠지 마음에 좋았다.

 

바다는 이 세상 모든 물의 끝이어서 더 이상 갈곳이 없었는데, 보이지 않는 그 너머에 있다는 흑산도는 믿기지 않았다. 바다는 인간이나 세상의 환란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어 보였다. 밀고 써는 파도가 억겁의 시간을 철썩거렸으나, 억겁의 시간이 흘러도 스치고 지나간 시간의 자취는 거기에 남아 있지 않았다. 바다는 가득 차고 또 비어있었다. 10-11

 

 

 

 

도초도 날뿌리를 돌아나가자, 섬도 산도 보이지 않았고 배는 하늘과 물 사이에서 흔들렸다. 해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하늘색과 물색이 같아서 배는 허공에 뜬 듯했다.

―나는 문풍세文風世요. 바다는 죽을 자리고, 배는 죽을 자리를 넘나드는 널빤지요. 배에서는 사공의 말에 따라야 하오. 귀양 가시느 선비도 장교도 마찬가지요. 49

 

 

섬사람들은 물가에 밀려와 바위를 끌어안고 모래 바닥을 핥는 물결을 바다에서 죽은 사내들의 넋이라고 여겼다. 넋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먼바다를 건너와서 살던 마을의 가장자리에 매달리고 그 물가를 핥아먹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고기를 많이 잡아서 돌아오는 저녁에 사내들은 뱃전을 두들기며 노래했다.

 

넋이야 넋이야 넋이로구나

밥이야 밥이야 밥이로구나

고기야 고기야 고기로구나

저 물결은 뉘 넋이며 저 고기는 뉘 밥이냐

넋이야 넋이야 넋이로구나

밥이야 밥이야 밥이로구나 87-88

 

 

장일청이 말하기를, 그 흙은 색깔로 봐서는 보통 흙과 다르지 않은데, 손으로 만져보면 입자가 곱고 찰기가 있어서 들러붙는다는 것이었다. 먹을 수 있는 흙은 산 밑으로 광맥을 이루며 뻗어 있고 그 입구는 산 중턱 양지바른 곳 바위틈 사이에 숨어 있어서, 거기서부터 바위를 들어내고 갱목을 쳐서 파 들어가면 광맥을 따라서 캐낼 수 있다고 장일청은 기록에 남겼다고 한다. 그 흙을 물로 헹구어서 흙냄새를 빼고 흙 칠 부에 보릿가루 삼부를 넣고 소금으로 간하고 버무려 반죽을 만들어서 쑥을 깔고 시루에 쪄내면 구수하고 쫀득거리는 떡이 된다는 것이었다. 장일청은 이 떡의 이름을 토춘土春이라고 지었다. 흙은 본래 성질이 따스하고 물과 불을 받아들여서 재우며 사람의 몸을 이루는 바탕이어서 토춘은 체질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먹어도 소화를 시킬수 있다고 장일청은 기록했다. 바다에서 죽은 자들의 혼백은 땅을 잊지 못하고 흙냄새가 그리워서 통곡하면서 캄캄한 물밑을 헤매고 있는데, 제사 때 이 토춘을 올리면 혼백이 물을 헤치고 달려와 느껍게 흠향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토춘은 사람과 귀신을 고루 보했다. 179-180

 

 

 

 

마노리는 길 걷기가 단잠처럼 편안했다. 마노리에게 걸음걸이는 힘을 쓰는 일이 아니었다. 마노리는 숨을 쉬듯이 걸었다. 걷는 마노리는 힘이 남아 있었다. 길고 가파른 고개를 넘어가면 사람의 마을이 나타났고 다시 바람 센 고원을 건너가면 억덕을 등지고 사람의 마을이 들어서 있었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 길이 있어서, 그 길을 사람이 걸어서 오간다는 것이 마노리는 신기하고 또 편안했다.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갈 뿐 아니라, 저 마을에서 이 마을로도 가면서, 길 위에서 서로 마주치기도 하고 마주친 사람들이 어긋나게 제 길을 가고 나면 길은 비어 있어서 누구나 또 지나갈 수 있었다. 길에는 오는 사람과 가는 사람이 있었고 주인은 없었다. 

사람이 사람에게로 간다는 것이 사람살이의 근본이라는 것을 마노리는 길에서 알았다. 41

 

오랫동안 병자를 관찰해온 이한직은 안색만으로도 남의 오장육부를 들여다볼 수 있어다. 여러장기들의 힘찬 작동과 편안한 조화가 마노리의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눈알에 잡티가 없었고 붉은 입술은 가장자리가 뚜렷했다. 오랜 걸음걸이가 장기의 운행에 힘을 불어넣고 있었다. 47

 

정약현은 그 어린 진사가 경서가 아니라 사물에 접하여 스스로 깨닫는 자득의 인간이기를 원했다. 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