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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vs그놈의 천하: 장예모<영웅>

 잔잔 2018. 7. 1. 17:36

천하vs그놈의 천하

 

 

 

  장예모 감독의 영웅은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강력한 법치로 국력을 다진 진나라 왕은 나머지 여섯 나라를 차례로 정복하며 통일을 꿈꾼다. 그리고 그만큼 진왕을 죽이려는 적이 늘어난다. 특히 조나라에서는 검법에 통달한 비설과 파검이 진왕암살시도를 하다 실패한 적이 있었다. 이에 진왕은 비설과 파검 그리고 또 한명 창검술의 달인인 장천을 죽인 자에게는 황금과 땅을 내리고, 십 보 앞에서 잔을 받을 수 있는 상을 내리기로 한다. 그러나 이를 이용하여 왕을 죽이려는 또 다른 이가 있었다. 그는 진의 군대에게 부모를 잃고 진나라에 입양된 무명이라는 자로 자신의 ‘십보필살법’으로 진왕을 암살하기 위해 장천과 비설, 파검을 설득하고 그들 셋의 무기를 들고 진왕에게 상을 받으러 간다. 무명은 대가들을 죽인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꾸며 진왕에게 들려주지만 진왕은 이야기를 듣는 도중에 무명의 속내를 간파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명이 진왕의 암살을 주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왜 머뭇거리는가.

 

 

(무명)

 

 

 

  그것은 3년 전 진왕암살을 포기하고 돌아간 파검의 설득에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파검은 서법과 검법을 공부하여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는데, 천하를 위해, 전쟁을 멈추기 위해, 평화를 위해서는 진왕처럼 통일을 이끌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파검의 연인이자 역시 검법의 대가이며 진군에게 아버지를 잃은 비설은 그의 생각의 동의하지 못했고 암살 실패 후 3년 간 그와 대화를 하지 않고 있었다. 무명이 암살을 주저하는 이유를 들은 진왕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호기롭게 칼을 뽑아 무명에게 건넨다.

 

 

“어디 천하를 위한 결정을 내려 보아라.”

 

  결국 무명은 진왕에게 검법의 최고경지를 잊지 말라는 경고를 주며 암살을 포기한다. 왕의 암살을 시도했던 무명은 죽게 되고 진왕은 그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준다.

 

  그 뒤로 비설과 파검은 어떻게 되었을까. 개인적으로 그들의 마지막장면은 꽤 당황스러웠다. 무명이 암살에 실패했음을 알게 된 비설은 파검이 그를 설득했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무명의 십보필살법은 완벽했으므로. 그래서 파검에게 대체 뭐라고 했냐고 물었고, 파검은 ‘천하’라는 두 글자를 말했을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비설은 여전히 그의 천하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파검에게 검을 뽑으라고 한 뒤 결투를 벌인다. 그리고 마지못해 검을 뽑은 파검은 비설의 공격을 막지 않고 받아들이며 죽는다. 왜 막지 않았냐고 울부짖는 연인에게 “이래야 믿을 테니까” 라며 잘 있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비설과 파검)

 

 

 

  그 순간 머릿속에서 선하나가 뚝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한 동안 이 두 남녀의 대결장면을 곱씹었다. 그 둘의 싸움은 천하의 안녕만을 생각하는 연인에게 화가 난 한 여인의 분노로 인한 결투가 아니라, 대의를 중요시하는 자와 사소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의 대결로 보였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 그 장면이 계속 남아있던 가장 큰 이유는 대의와 사소함을 두고 싸우는 장면을 남성과 여성간의 결투로 그려낸 건 차치하고서라도, 파검의 행동에 화가 치밀었기 때문이었다. 첫 째로 정말 사랑한다면 끝까지 싸우며 설득하려 했어야지, 죽음으로 자신의 진심을 증명하려 했다는 점. 두 번째는 자살도 아니고, 그녀의 검에 찔려 죽음으로써 결국 그 비수를 그녀에게까지 꽂게 했다는 점이다.

 

  천하를 위해, 천하의 평화를 위해, 자신이 이상으로 삼은 대의명분을 위해 자신이 한 행동이나 결과를 상대방에게 납득시키지 못하자 결국 죽음이라는 일종의 폭력적인 강요와 협박으로 끌고 가다니! 관객으로서, 또 사소함을 사랑하는 이로써 파검과 비설의 결말이 어이없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이 영화가 대의를 위한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솔직히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진왕이 어디 천하를 위한 결정을 해보아라, 라며 던진 그 검을 내가 받아 찌르고 싶을 정도였다.

 

  영화는 그러한 파검과 비설, 무명의 죽음을 영웅의 죽음 또는 희생으로 칭송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진시황은 최초로 중국을 통일 했으며 만리장성을 쌓아 나라와 국민을 보호했다는 자막이 화면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짐작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말하는 영웅은 천하통일이라는 대의를 위해 희생된 세 명의 인물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의 통일 이후 역사를 본다면, 물론 영화는 픽션이지만, 과연 영화에서 말하는 그러한 ‘영웅’들의 수많은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단호히 말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집단의 큰 뜻, 큰 그림, 대의 같은 걸 믿지 않는 편이다. 어쩌면 그런 건 일종의 판타지나 환상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것들을 신념으로 삼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판타지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의 판타지를 다른 이에게 강요하는 것, 그것도 폭력적으로 강요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더욱 교묘하게 폭력이 아닌 체하면서 세뇌시키거나. 이 영화는 교묘한 축에 속한다.

 

  장예모 감독의 영웅은 중국의 전통적인 것들-바둑, 음악, 서법, 무술, 역사 등을 다채로운 색감과 함께 예술적으로 잘 표현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의 내 입장에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메시지는 소위 ‘국뽕’이라 일컬어지는 영화들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진시황과 그런 진시황을 위해 죽은 영웅들을 추켜세우는 것은 결국 중국, 하나의 거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을 찬양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 주인공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천하’, 대체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한번쯤 고민해볼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평가를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비설과 파검의 결말에 대한 아쉬움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그래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분명히 하자면, 내가 아쉬운 건 파검이 천하의 평화라는 어떠한 이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그건 그의 판타지다. 문제는 자신의 판타지에 관한 태도다. 이 문제적 캐릭터는 결국 영화 전체가 교묘하게 대의를 위한 희생을 강요하듯 자신도 깨닫지 못한 채 이상을 향한 자신의 폭력적인 태도를 아름답게 치장하고 있다(집중해서 보다보면 양조위의 그 눈빛에 말려들어간다).

 

  서로 다른 판타지, 이상, 꿈을 가진 이들 간의 싸움은 불가피하다. 그 관계가 연인이든, 가족이든, 정치적 동지든, 직장동료든 간에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싸움에서 가장 멀리해야 하는 태도는 바로 비설과 파검이 택한 '포기'라고 생각한다. 양쪽 모두에게 비극적이며, 허무하기까지 한 그런 결말은 정말 참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반대로 끝없는 싸움을 계속 하는 것 역시 얼마나 소모적이고 지치는 일인지도 알고 있다. 그래서 포기가 아니라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은 싸움들이 무수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끝없는 싸움을 지향한다. 그게 바로 나의 판타지다. 그래서 비설과 파검이 죽지 않고 끝까지 "천하vs그놈의 천하"를 두고 설전을 벌이고, 검이나 뽑으시지, 하며 계속해서 싸웠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진시황 그리고 파검의 검劍; 서법과 검법의 연결고리에 관심이 간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