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 방/공책

알베르 카뮈 <전락>

 잔잔 2018. 6. 16. 20:24

집 앞 도서관에 큰글자도서밖에 없어서 큰글자도서버전의 <전락>을 빌려 읽었다. 

글자가 너무 커서 처음엔 어색했지만 금새 익숙해졌다. 

5월 어린이날 토요일, 일요일, 그리고 대체휴일 월요일까지 읽었다.

 

책은 얇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끌라망스가 암스테르담의 멕시코시티라는 한 바에서 만난 누군가와 며칠에 걸쳐 만나 대화하는 내용인데, 

대화상대방의 말은 한마디도 없고 화자의 말이 전부다. 

끌라망스느 잘 나가는 변호사였다. 하지만 어느 날 타인의 죽음을 직접 듣게 된다(풍덩)

그리고 그 순간을 외면했던 끌라망스. 이후 그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책 제목처럼. 

 

끌라망스는 속죄판사가 되어 자신의 바닥을 보여줌으로써 타인의 속죄를 이끌고자 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독자를 향해서도. 

 

그래서 가정의 달 5월의 첫주, 이 책을 읽으면서 끌라망스의 의도대로 나에 대한 만족감이 떨어졌

었다(물론 책이 이야기하는 전락에 비하면 아주아주 얕은 수준이지만)

 

 

 

알베르 까뮈 <전락> 

창비세계문학 큰글자도서

 

 

 

12. 이곳에 오기 전, 나는 변호사였습니다. 지금은 속죄판사고요. 그럼, 내 소개를 하겠습니다. 장바띠스뜨 끌라망스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알게 되어 반갑습니다.

 

 

 

35. 우정은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실천할 수 없는 겁니다. 어쩌면, 마음으로도 절실히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가 삶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닐까요? 죽음만이 우리의 감정을 일깨운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막 사별한 친구들을 얼마나 애달파합니까! 또 입에 흙이 가득 차 더이상 말할 수 없는 스승들을 얼마나 존경합니까! 이때는 존경이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지요. 이들이 평생 우리한테서 받고자 했을 그 존경이 말입니다. 그런데 왜 항상 죽은 자들에게 더 공종하고 더 너그러운지 아십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에겐 지켜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우리를 자유롭게 내버려둡니다. (...) 혹 그들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뭔가가 있다면 바로 기억일 것입니다. 하나 우리는 이마저도 짧게 기억할 뿐이지요. 아니, 우리가 친구들에게서 정말 사랑하는 것은 갓 숨이 끊어진 죽음, 고통스러운 죽음, 우리의 아픈 마음입니다. 결국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우리 자신인 거지요!

 

 

 

46-47. 무릇 인간이란 남을 지배하든가 남에게 섬김을 받든가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존재라는 건 잘 압니다. 누구에게나 맑은 공기가 필요하듯 노예란 필요하지요. 명령하는 것은 곧 호흡하는 것이니까요. 여기에 동의하시죠? 가장 불우한 사람조차도 숨은 쉬게 마렵입니다. 사회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도 배우자나 자식이 있고 독신일 경우엔 개가 있지 않습니까. 요컨대 핵심은, 상대는 대꾸할 권리가 없으니 자신은 화를 낼 수 있다는 겁니다. ‘아버지한테 말대답해서는 안된다’라는 상투적인 말이 있습니다. 알고 계시죠? 어떤 면에서 보면, 이 말은 좀 이상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한테가 아니면 대체 누구에게 말대답을 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달리 보면 꽤 설득력이 있는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대적할 수 없는 상대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지 않으면 모든 이유들이 서로 대립할 수 있고, 결국 끝이 나지 않을 테니까요. 이와 반대로, 권력은 모든 것을 단번에 끝내줍니다. 많은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우리는 이것을 터득했지요.

 

 

 

49. 이런 명함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뒤뽕, 비겁한 철학자’ 혹은 ‘기독교도, 악덕지주’ 혹은 ‘상습 간통자, 휴머니스트’. 선택은 그야말로 자유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됐건 지옥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지옥은 틀림없이 거리마다 간판들이 즐비하고 해명할 방법이 전혀 없는 곳, 누구나 일단 분류되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그런 곳일 겁니다.

 

 

 

52. 결국 나는 그날그날 나, 나, 나로 이어지는 연속 이외엔 아무것도 없이 살았습니다.

 

 

 

81. 헌데 심판을 막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제 본성을 찬양하는 동시에 변명하는 것은 몹시 낯 뜨거운 일인지라 다들 부자가 되려고 하는 거지요. 왜 그럴까요? 왜 그런지 생각해보신적 있습니까? 당연히, 권력 때문이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부란, 코앞에 닥친 심판을 면하게 하고, 지하철 군중 속에서 끌어내 니켈로 도금한 자동차 안에 넣어주고, 경비가 삼엄한 널따란 정원이나 침대차나 특등실에 혼자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재력이란 말이지요. 무죄방면까지는 아니더라도 집행유예쯤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어쨌든 손에 쥐고 볼 일이지요....

 

 

82. 단테를 아십니까? 아, 그래요? 놀랍군요. 그럼 단테가 신과 악마 사이의 논쟁에서 중립적인 천사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걸 아시겠군요. 그는 자신이 묘사한 지옥에서 일종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림보(지옥의 변방 즉 천군과 지옥 사이의 장소로 세례를 받지 않은 어린아이나 예수 탄생이전에 죽은 선한 영혼들이 머무는 곳이다)에다 이 천사들을 배치해두지요. 선생님, 우리는 지금 이 관문에 와 있는 겁니다.

 

 

 

106-107. 하긴, 당신은 중세 때 고난실이라 불리던 지하 감방을 모르겠군요. 대개의 경우,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었지요. 이것이 여타의 감방들과 다른 점은 교묘한 크기에 있었습니다. 서 있을 수 있을 만큼 높지도 않고 드러누울 수 있을 만큼 넓지도 않아, 엉거주춤 어색한 자세로 대각선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잠이 들면 전락轉落이었고, 깨어 있을 때는 웅크린 자세였지요. (...) 날마다 몸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확고부동한 구속에 의해, 이 수형자는 자신이 죄인이며, 무죄란 사지를 맘껏 펼 수 있는 데 있음을 체득하게 되는 것이었지요.

 

 

 

129. 누구에게도 변명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일을 시작할 때 내세우는 원칙입니다. 선한 동기, 존중할 만한 과오, 실수, 정상참작 따윈 일정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 사무실에서는 축복을 빌어주지도 않고 사면을 베푸는 일도 없습니다. 단지 합계를 낸 다음 “당신의 값은 이것이오. 당신은 배덕자인데다 호색한, 허풍쟁이, 남색가, 예술가 등등이오”라는 식이지요. 게다가 아주 매몰찹니다. 나는 정치에서든 철학에서든 인간의 무죄를 거부하는 모든 이론에 동의하며 인간을 죄인으로 취급하는 모든 관행도 찬성합니다.

 

 

 

133. 멸시받고, 쫓기고, 강요당하게 되면, 비로소 나는 내 진가를 온전히 발휘할 수 있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즐길 수 있습니다. 요컨대 본연의 모습이 될 수 있는 거지요. 선생님, 바로 이 때문에 엄숙히 자유를 경배했던 내가, 누군지도 모를 자에게 이 자유를 미련없이 맡겨버려야 한다고 은밀히 결심했던 겁니다.

 

 

 

137. 웃지 마십시오! 그래요, 단박에 알아보긴 했습니다만, 확실히 까다로운 고객이로군요. 하지만 당신도 결국 그렇게 될 겁니다. 이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 이들에겐 그 방법을 철저히 설명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이들은 이것을 잊지 않고 곰곰이 되새기다 어느 날, 반은 장난삼아, 반은 혼란에 빠져 결국 고백하게 되지요. 당신은 지성적일 뿐 아니라 노련하기까지 한 것 같군요. 하지만 솔직히 털어놓아보십시오. 닷새 전보다 지금, 당신 자신에 대한 만족감이 덜하다는 걸 느끼시지요?

 

 

 

139-140. 나는 죄를 사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지 않고 이해해줄 뿐입니다.

 

 


 

 

 

 

“저는 철학자가 아닙니다. 저는 체계를 믿을 정도로 충분히 이성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제 관심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신도 이성도 믿지 않을 때 어떻게 처신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1945.12.20.) 세르비르지와의 인터뷰, <알베르 까뮈2> 올리비에 토드, 김진식 옮김, 책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