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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번역과 동아시아: 중국의 번역어와 중국의 근대(양세욱)

 잔잔 2018. 7. 23. 14:13

 

동의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에서 2015년에 엮은 <근대번역과 동아시아>에는 1부 근대번역과 동아시아 철학, 사상에 5편의 글이 있고, 2부 근대번역과 동아시아 문학에 6편의 글이 있어 총 11편의 글이 실려 있다. 

 

'한자문화권의 철학과 사상 등의 발전 과정을 번역사적인 관점에서 조망하고자' 엮은 1부의 글 가운데서 한 편의 글을 뽑아 읽었다.

<중국의 번역어와 중국의 근대(양세욱)>

 

무척 흥미롭게 읽었고, 책에 실린 나머지 10편의 글도 모두 읽어보고 싶어졌다.

 

 

 

 

58

동아시아에서 근대는 풍문으로 먼저 왔다. 번역은 동아시아에서 근대를 형성해가는 중요한 과정이자 방법이었다. 근대 동아시아는 번역을 통해 서양을 이해하고 근대라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분투하였다. 서양의 학문이나 사상, 제도, 지식체계 등을 담은 생소한 개념어를 어떻게 번역하여 보급할 것인가 하는 것은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주어진 절박한 과제였다. "근대"라는 말 자체가 "modern"의 번역어라는 사실은 동아시아 근대의 이런 성격을 상징한다[주석: "근대"가 "가까운 시대, 요즘, 최근" 등과 같은 일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modern"의 번역어로 "(고대나 중세에 대비하여) 중세에 이어지는 시대와 그 시대의 사건, 인물, 작가 등을 가리키는 말(옥스퍼드 영한사전)"로 쓰이기 시작(...) 중국에서 근대는ㄴ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아편전쟁(1840)부터 5.4운동(1919)때까지를 가리킨다. 5.4운동부터 중화인민공화국수립(1949)이전까지는 "현대", 그 이후으는 "당대當代"로 구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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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 중국에서 이루어졌는지 일본에서 이루어졌는지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중국과 일본은 서로를 참조하고 영향을 주고 받았으므로 번역어의 산지를 정확히 밝혀내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경우도 드물지 않다. 중국에서 이루어졌든 일본에서 이루어졌든 언어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번역은 동아시아의 공동문자였던 한자와 중국고전을 매개로 진행된 작업이었다. 그러나 언어 밖에서 일본의 번역어는 권력이 있었따. 근대 번역어의 생산과정에서 자신들이 망각한 이전의 번역 성과에 대한 중국의 뒤늦은 재발견과 한국의 무임승차는 그 대가를 치렀고, 일본은 그 보상을 받았다. 뒤이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일본의 화려한 등장과 중국과 한국의 몰락 원인을 번역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번역을 무시하고 그 원인을 찾는 일 또한 핵심을 비켜날 수밖에 없다. 일본의 아시아 침략의 이념적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받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문명"과 "사회", "자유" 등 중요한 번역어를 다듬어낸 열렬한 번역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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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번역,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형성된 근대 번역어는 동아시아에서 근대를 형성해가는 중요한 과정이자 방법이었다. 동아시아의 근대가 "번역된 근대translated modernity"인 이유이다["번역된 근대"는 Liu(2995)가 중국의 근대 형성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핵심적 개념이, 서명의 일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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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언어는 언어접촉을 통하여 다른 언어들과 교류하고 혼합하는 과정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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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는 이 티베트-버마어족의 먼 친척으로 생각되고 있다[Crystal(1997) 등과 같이 "중국-티베트어"를 한 어족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중국은 언제나 중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여러 이웃 언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중국어가 주변 언어에 미친 영향에 비해 주변 언어가 중국어에 미친 영향은 간과되거나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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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언어들에 간섭만 하고 이웃 언어들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는 중국어에 대한 환상은 "중화주의" 또는 "중국적 세계질서"의 언어적 변응에 다름 아니다.

현재까지 기원이 밝혀진 중국어 차용어는 그 역사를 기원전까지 소급할 수 있으며 특히 한漢 이후로는 문명 교류와 함ㄲ 중국어에 새로 도입된 물질문화와 연관된 차용어들이 지속적으로 증가한다. 이들 차용어들은 먀오어, 야오어, 몬어, 크메르어, 타이어 등 오스트로-아시아어족, 서역의 언어인 인도-이란어족과 인도-유럽어족, 흉노, 선비, 몽고, 만주어 등 알타이어족 등 그 기원이 다양하다. 특히 불교의 동전東傳과 함꼐 대규모로 유입된 산스크리트어 차용어의 영향력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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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네덜란드어의 한 단어를 일본어로 번역하기 위해, 그 단어의 어원과 변천과정, 당시의 쓰임새 등 전 역사를 조사한 뒤, 그에 상응한다고 판단된 한자어를 골라내기 위해 고대 중국문헌을 뒤적이거나 한자를 조립하여 새로운 어휘를 만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73-74

메이지 시대의 번역 열풍은 초기의 의학에서 화학, 물리학, 천문학, 군사학 등을 거쳐 철학의 영역에 까지 확장되었다. 일본 최초의 네널란드 유학생이자 "근대 일본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니시아마네가 만든 근대 번역어 "철학"의 예를 통해 근대어가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니시아마네느 그 당시 많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난학(네널란드문헌들을 통한 서양학술역구)에 참여하여 쓰다 마미치와 함께 1862년부터 1865년까지 네덜란드 레이든대학교에서 유학하였다.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 쓰다 마미치, 모리 아리노리 등과 함께 "문명개화"를 기치로 내건 메이로쿠사의 일원으로 철학, 심리학, 논리학 등과 관련된 새로운 용어를 처음 만들었다. 니시 아마네는 네덜란드로 유학하기 직전 도쿄대학교의 전신인 가이세이쇼에서 철학 강의를 하였는데, 이때 가르친 과목을 "希哲學(기데츠가쿠)"라고 불렀다. "希哲學"은 송宋 주돈이의 <통서通書>에 나오는 "聖希天, 賢希聖, 士希賢(성인은 하늘을 바라고, 현인은 성인을 바라며, 사인은 현인을 바란다)"에서 암시를 얻은 말이다.  "Philosophia"가 "希賢"의 정신과 통한다고 여겨 처음에는 이를 "希哲學"으로 옮겼다가 "賢"이 지나치게 유가의 색채가 짙다고 하여 결국 "賢"을 "哲"로 바꾼 "希哲學"이 되 ㄴ것이다. 니시 아마네는 이때의 강의를 토대로 1874년에 출판한 <백일신론百一新論>에서 "希哲學" 대신에 "希"를 생략한 "哲學(데츠가쿠)"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이 "哲學"이란 번역어는 이후에 중국어로 수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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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번역에서 출발어와 도착어 사이에 의미의 등가성이 어느 정도까지 설현 가능한지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진행되었다. 번역이라는 작업은 원칙적으로 두 언어 사이의 등가성을 전제로 하지만, 상이한 사회, 문화적 배경을 지닌 두 단어가 내용의미와 색채 의미까지 동일하기란 어렵다. 따라서 번역은 의미의 번역이면서 맥락의 번역이기도 하고 나아가 문화의 번역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저명한 작가이자 번역가 발레리 라르보는 번역을 "한마디로 말의 무게를 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울의 한쪽에 저자의 말을 얹고 또 한쪽에는 번역어를 올려놓는다. 그리고 이 둘이 균형을 이룰 때까지 작업을 계속해나간다. 하지만 저울에 올리는 것은 사전에 정의된 말이 아니라 저자의 말이다. 저자의 저인이 투입되어 스며들고 있고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이기는 하지만 기은 수정이 가해진 말이다. 그것은 살아서 고동치는 말이며 원문에서 벗어나있다 하더라도 다리를 뻗어 작품 전체와 긴밀히 얽혀 있다. 저울에는 그 생명의 무게가 얹힌다. 따라서 저울의 또 한 편에도 똑같은 생명의 리듬을 타고 움직이는 등가의 무게가 필요하다. 

 

85

근대 동아시아에서 진행된 서양 언어의 번역 과정에서 보다 현실적인 어려움은 믿고 의지할만한 사전 자체가 부재하였다느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번역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중국과 일본에서 앞서 인용한 바 있는 여러 사전들이 하나, 둘 출간되었지만, 이 사전들조차 표제어에 대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번역어들을 모아 놓은 일정의 번영 용례집에 가까운 매우 불완전한 것이었다. 각종 사전이 잘 갖추어진 지금도 번역 작업이 지난한 일임을 감안할 떄, 아예 사전이 없는 번역작업의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는 실감하기 어렵다.

보다 근본적인 어려움은 번역하고자 하는 개념이나 현상 자체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는 데에 이었다. 즉 있는 현실이 아니라 있어야 하는 현실의 개념들을 대상으로 번역 작업을 진행해야 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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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부 아키라는 일본의 번역사를 살피면서 번역이 사람들을 조종하는 마술의 힘을 "카세트 효과"라고 이름 붙였다. 

 

일본어에서 한자어가 갖는 이런 효과를 나는 "카세트 효과"라고 부른다. 카세트cassette란 작은 보석상자를 의미하며, 내용물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매혹하고 끌어당기는 물건이다. "사회"도 그렇고, "개인"도 일찍이 이런 "카세트 효과"를 발휘한 단어였으며, 그 효과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오늘날의 일본인들에게도 여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카세트는 보석상자를 의미하는 프랑스어로, 예쁘고 매력적인 카세트는 그 안에 대단치 않은 물건이 들어있거나 심지어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아도 보석이 들어 있을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일종의 "신비주의" 효과이다. 번역을 통해 탄생한 신어는 카세트처럼 매력적이었고, 의미가 빈약한 경우에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이런 효과를 통해 출발어와는 다른, 때로는 출발어보다 풍부한 의미를 획득해갔다. "음식문화, 기업문화, 대중문화, 밤문화, 여행문화, 대학문화, 청소년문화, 교통문화, 길거리문화, 사이버문화" 등으로 확장되는 "문화"가 그 한 사례이다. 이러한 의미의 화장 덕분에 문화는 체계적인 정의가 불가능한 개념이 되고 만 듯하다. 

 

 

88

고대중국어의 어휘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으며 서양 개념어의 번역어로 채택된 "회귀 번역어"의 사례들은 크게 둘로 양분할 수 있다. "회귀 번역어"의 첫 번째 부류는 "개인"과 "사회"처럼 고대중국어에서 사용되었으면서 사용빈도가 높지 않은 번역어들이며, 두 번째 부류는 "자유"와 "자연"처럼 고대중국어에서 사용되었으면서 사용빈도 또한 높은 번역어들이다. 

(...)

"개인"과 "사회"는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혼란스러운 말인 듯하다. "개인"의 경우 "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일상적인 용례와 사회를 구성하는 단위로서의 사회학적 용례가 혼용되는 예가 흔하다. "사회" 역시 소규모 집단으로부터 가족과 친족 등으로 형성된 자연적 공동체, 다수 언어와 인종 등으로 구성된 대규모 집단에 이르기까지 그 용례가 다양하다. 심지어 "사회 진출" 등과 같이 학교와 사회가 대립하기도 하고, 주로 군대 안에서 군대를 사회와 대립시키는 이분법이 통용되기도 한다. 

 

89

"개인"과 "사회"가 individual과 society의 번역어로 확정되기까지의 우여곡절을 살펴보면 메이지 초기의 일본인들에게 이 말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이었음이 분명하다. 야나부 아키라는 "사회"라는 번역어의 성립 과정을 검토하면서 "본래 society는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운 말이었다. 무엇보다도 society에 해당하는 말이 일본어에 없었기 때문이다. 해당하는 말이 없었다는 것은 곧 society에 대응할 만한 현실이 일본에 없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91

중국의 고전에서 "사회"는 "봄, 가을에 신령을 맞이하기 위해 벌이는 모임"으로 사용되다가 명明 이후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모여 조직한 조직이나 단체"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92

society에 이런 좁은 범위의 인간관계가 아닌 보다 심오한 의미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이를 번역어로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은 후쿠자와 유키치이다. 

 

93-94

"사회" 또는 "회사"를 society의 번역어로 다듬어 간 공로는 메이로쿠사와 <메이로쿠 잡지>로 돌아갔다. (...)  오랫동안 사용해온 "세상"은 society의 유력한 번역어 후보였찌만 지나치게 일상적이고 부정적인 어감까지 풍기는 바람에 society의 번역어로 선택되지 못했따. 이에 비해 "사회"는 오래된 한자어이기는 하지만 일본인에게는 "사"와 "회"를 결합한 신조어나 다름없는 생소한 말이었따. 일본인들은 "세상"이라는 익숙한 말보다 "사회"라는 추억이 없는 말을 선택했다. 이 번역어는 의미가 불명확하다는 단점과 의미의 곡해를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번역어의 탄생 과정에서 "사회"와 같이 의미가 불분명한 단어들이 선택되는 예는 흔하다. 밑그림이 없는 백지장과 같은 단어를 선택하고 그 단어의 운명을 미래에 맡기는 셈이다.

 

 

 

116-117

"우리 모두는 그리스인이다." 저널리스트 고종석의 이 도발적인 선언은 지금 우리 제도와 우리 일상생활, 우리 사상과 무엇보다 우리 언어의 본질적 부분이 그리스(또는 이집트) 이래의 유럽 문화에서 비롯되었으며, 따라서 유럽 문화는 이미 우리의 "지배적 전통"이 되었다는 성찰과 고백을 함축하고 있다[<인물과 사상> 제8권(1998.10)에 처음 발표되어 <감염된 언어(1999)>에 재수록 되었던 이 글은 복거일의 책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로 촉발된 '영어공용어화 논쟁에서 복거일을 옹호 내지 변호하기 위해 쓰여졌다. 국어의 어휘가 외래어에 감염되어 있다고 개탄하고, 국어의 문체가 번역문투에 감염돼 있다고 지탄하는 언어민족주의자들 또는 언어순결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고정석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문화어휘"의 대부분은 일본인들이 서양말의 개념을 옮겨 만든 한자어가 19세기 말 이래 수입된 것이며, 한국어 글말의 탄생과 발전, 정착 그 자체가 번역의 과정이라는 논리로 맞선다. 또 "감염"과 "혼탁"과 "불순함"이야말로 언어의 본질이며 생명력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으로 시작하는 헌법의 전문에 등장하는 "역사, 전통, 민주, 이념, 개혁, 정의, 인도人道, 민족, 사회, 자유, 질서, 정치, 경제, 문화, 권리, 의무, 국민, 세계, 평화, 인류, 행복" 등의 어휘를 이 어휘들의 모어인 유럽어로 치환한 채 읽었을 때의 생경함을 떠올려보라. 헌법 전문의 형태로 구체화된 현재 대한민국의 지배적 이념과 윤리가 그 원산지는 유럽이고 그 중개자는 중국과 일본이라는 사실을 체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랫동안 우리의 "지배적 전통"이 중국이었고 그 흔적이 아직도 또렷하다. 동아시아인의 지배적 이념과 윤리를 표현하는 이 번역어들의 기표는 한자이며, 서양의 개념들은 한자를 만나 크고 작은 의미으 충돌과 혼용을 빚어왔다. 번역되는 말이 고유의 사회, 문화적 맥락속에서 다양한 의미의 변주를 겪듯이, 번역된 말 또한 번역되는 사회, 문화적 맥락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해왔따. 요컨대 이 번역어들은 유럽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중국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