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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날개 있는 저자 수잔바스넷 소개

영국에서 번역학 및 비교문학을 가르치는 전세계적인 석학. 

앙드레 르페브르와 함께 1990년 처음으로 번역학의 '문화적 전환'을 정의하고 단순한 언어적 접근을 뛰어 넘어 역사, 문화와 같은 더 넓은 컨텍스트에서 번역이 연구되어야 한다고 주장. <번역학1980>, <문화구성1998>, <번역2014>


그리고 옮긴이 윤선경은는 영국에서 수잔바스넷의 지도를 받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고. 스승의 책을 번역한 셈.


번역에 관한 다양한 주제로 쓰인 39편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저자는 이 책이 '번역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한 여자의 성찰로서' 이 책이 읽히길 바란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이 책은 번역을 해보고 싶다는 내게 학과교수님이 추천해주신 책이다. 이 책을 먼저 읽어보고 그 다음 <번역과 제국>을 읽어보라고 하셨다.


밑줄친 부분들을 옮겨적는다(엄청 많다).

막연히 번역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떄 떠올린 건 문학작품, 특히 소설이나 수필을 번역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문학작품 번역가운데에서도 특별히 생각해보지 못한 시번역, 극(희곡)번역의 어려움과 과제 등등에 대한 고민도 있고,

뉴스 번역, 지명 번역, 식재료(요리) 번역, 각 지역의 날씨나 계절 번역, 욕 번역, 가족호칭 번역 등등 실로 다양한 번역과 그러한 다양한 번역들 각각의 미션이나 과제, 생각해봐야하는 점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번역과 권력, 번역과 젠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번역, 번역의 역사, 번역이론, 직역과 의역의 사이에서 번역가의 역할, 소수언어의 번역, 언어와 정체성, 번역의 역할, 외국어공부의 진정한 필요성, 번역의 과정(구체적인 그녀만의 방식) 등등 정말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녀가 끊임없이 주장하는 것은 번역은 정말 중요하다는 것. 그런데 그 중요함에 비해 번역가나 번역에 대한 시선, 처우가 좋지 않다는 것. 그 점을 개선하기 위해 젊었을 떄부터 동료들과 노력해왔다는 것 등이다. 

번역일을 하면서 번역학연구를 하고 또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번역을 가르치면서 그녀가 치열하게 느끼고 고민했던 지점들을 책을 통해 읽어낼 수 있다. '성찰'이라는 제목이 너무 잘 어울렸다.


설령 저자소개를 보지 않고 글을 읽었다하더라도 그녀가 아주 많고 다양한 경험과 학식을 가진 번역가이면서 선생님이라는 것을 그녀의 글을 통해 계속 느낄 수 있었다.





서론18-19

에코는 <번역하기와 번역되기>라는 글에서 번역가는 대략적으로 문화적인 규칙들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donnez-moi un cafe4' 'give me a coffe', 'mi dia un caffe'와 같은 단순한 구절의 예를 든다. 이 세문장은 언어적으로 상응하고 모두 똑같은 진술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상응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그 문장들을 말하면 각기 다른 효과가 생기고, 그 문장들은 다른 습관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그 세 문장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Eco, 2001: 18)


에코는 비록 그 다른 이야기가 무엇인지 자세히 논하지 않지만, 세개의 문화권에서 커피 마시기라는 매우 다른 관행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는 이 세문장에서 다른 수준의 공손함을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뢍스어에서는 명령법이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영국 영어에서 커피 부탁은 'please'라는 말이 따라 붙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상대를 기분 사아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코는 다음과 같이 중요한 것을 지적한다. 즉 번역가들은 텍스트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문화적으로 결정된 뉘앙스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번역이 하는 일은 차이에 깊은 관심을 두는 것이다. 번역가의 임무는 차이를 협상하고, 균질화를 피하는 방식을 찾는 동시에 차이가 오해를 낳지 않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척 힘든 작업이며 그렇기에 번역을 서술하기 위해 종종 이용되는 일종의 '중간지대no man's land'같은 호전적인 메타포가 적절해 보인다. 보통 우리는 중간지대를 양쪽에서 싸우고 있는 두 군대 사이의 땅이라고 생각한다. 종종 지뢰가 많이 설치되어 있어서 그 공간을 통과하려는 사람은 누구든 큰 위험에 처할 것이다. 번역가는 조심스럽게 지뢰밭으로 들어가고 저격수가 양쪽 진영에서 지켜보는 것을 경계하며 또한 가시철좡에 엉켜 버릴까 조심한다. 

만약 번역가가 직역주의의 위험을 피하고 어떤 가치 있는 것을 창조하고자 한다면 페이지 위의 단어를 번역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단어들 뒤에 있는 드러나지 않는 배경, 즉 '텍스트 뒤에 있는 텍스트text behind the text' 역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번역가는 다음과 같은 커다란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만약 번역가가 원본을 존중하고자 한다면, 텍스트의 변형에 얼마나 많은 범위가 허용될 수 있을까? 번역가가 텍스트를 바꾸거나 추가하거나 삭제하거나 하는 것은 합법적인 것인가? 혹은 번역가는 원작을 번역하는데 원저자에게 어떤 책임이라도 느끼는가?





언어와 정체성 28

몇 년 전 내 영어 발음에 관심 있는 방언학자를 만났는데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소리의 패턴을 분석하기 위해 내 말을 녹음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몇 주 후에 그 방언학자는 사실상 언어의 일대기라고 볼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나를 다시 찾아왔다. 그녀의 연구팀은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미국 영어(남편의 영향), 잉글랜드 북쪽의 모음 소리(부모님의 영향), 그리고 마침내 기적적으로 스칸디나비아어의 흔적들을 발견했다. 20년이 지난 후에도 덴마크어는 소멸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어딘가에 잠겨 있다가 특정한 억양으로 수면에 천천히 다시 떠오른 것이다. 

조지스타이너는 자신의 어조가 무엇인지 묻는다(어떤 언어로 나는 존재하는가? 영어로, 불어로, 독일어로? 나는 언제 가장 나다울까? 내 자신의 어조는 무엇일까?(Steiner, 1975: 125). 그것은 그가 여러 언어를 구사한다는 사실가 그가 살아온 인생 및 지적인 관심사를 고려해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질문이다. 그러나 나의 출발점은 다르다. 나는 그런 질문을 자문한적이 없다. 나는 내 머릿속에 있는 다양한 언어를 다 벗기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양파껍질과 비슷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스타이너의 세계관은 지질학, 층, 퇴적에 기초한다. 나의 세계관은 액체 메타포이다. 언어는 물처럼 흐른다. 언어적 조류는 나에게 밀물이 되고 썰물이 된다. 나의 언어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내 인생에서 각기 다른 순간에 각기 다른 언어가 중요했었다. 





직역은 유용하다? 43-44

다른 언어를 아는 것이 아름다운 이유는 다른 언어로 다른 방식으로 다른 것을 할 수 있기 떄문이다. 나는 이것을 수년 간 내 자식들과 학생들 모두에게 반복해서 말해왔다. 직역은 다른 언어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이해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세상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을 배우는 과정의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론과 실제, 그 오래된 딜레마 47-48

로렌스 베누티의 <번역의 비가시성1995>은 번역가의 중요성에 대한 훌륭한 논거를 제시하였다. 베누티는 그 책에서 연금술로 단어를 지나가게 하는 투명한 필터 정도로밖에 인식되지 못하는 번역가가 어떻게 도착언어로 작품을 적극적으로 재구성하는지 보여주었다.

그러면 번역가들은 자신들을 위한 베누티의 노력에 고마워하는가? 베누티의 책을 읽고 그의 학문을 존경하는 몇몇 사람들과 얘기해 본 결과 평가는 엇갈렸다. 물론 번역갇ㄹ은 베누티가 번역의 위상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론가들이 많이 논의하는 베누티 개념 중의 하나에 어떤 불안감이 서려있다. 베누티가 말하는 '이국화foreignization'가 그것이다. 이 개념은 '자국화domestication' 혹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문화적응acculturation'과 정반대의 것이다(Venuti, 1995). 이 모든 것은 현재 최신 유행하는 용어이며 서로 다른 이 번역 전략들의 상대적인 장점에 대한 입장은 매우 다양하다.

나는 (친구인) 베누티가 이국화에 대한 그의 생각을 요약하는 것을 양해해 주기를 바란다. 간단히 말하면 베누티는 번역가들은 번역하는 텍스트의 이국성을 어떻게 하든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목적은 독자들이 어떤 다른 문화권의 다른 곳에서 탄생한 작품을 읽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번역이 이국적인 것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린다면 번역가는 눈에 띄지 않게 되고, 게다가 그 외국 텍스트는 도착어권 문화에 의해 전유되어 그 본질적 다른 성질들은 사라질 것이라고 베누티는 주장한다. 

사실 이것은 독창적인 이론이 아니다. 베누티는 독일 낭만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하머의 사상을 따르고 있다. 그 독일 철학자의 번역관은 19세기 초에 형성되었고, 모든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자국화해서 고대 그리스 영우이 베르사이유 궁전의 조신으로서 그려졌던 프랑스 번역학파의 반대편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번역 전략으로서 베누티의 이국화 이론은 이국성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는 자국화 번역에 불안을 떨치지 못했던 포스트식민주의 번역학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49-50

번역 이론 중 가장 유용한 것은 실제로 번역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왔다. 퍼시 비셰 셸리의 유기적 이식organic transplatation이라는 번역 개념은 가장 마음에 드는 이미지 중 하나이고, 옥타비오 파스의 번역에 대한 아이디어도 좋아한다. 파스에 따르면 작가가 단어를 완벽한 형태로 고정시키는 것이라면 번역가의 일은 그 똑같은 단어를 해방시키고 그 단어가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갖는 다른 언어 속으로 풀어주는 것이라고 한다. 







번역은 얼마나 현대적이어야 하는가? 59

한 작품이 고대나 중세시대의 것이라면 번역가는 번역되는 언어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그 작품이 옛날 것이라는 사실을 표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번역가들이 있다. 이것이 빅토리아 시대의 관점이었지만 중세화 유행이 사라진 주요 이유는 번역가들이 언어를 새로 발명해야 했고 누구도 그 번역가들이 자신의 번역물에 쓴 가짜 중세 영어를 말하지 않았고 그 결과물은 독자에게 설득력이 없었기 떄문이다. 나는 번역이 참되게 들리고 잘 읽히려면 번역가는 자신의 언어로, 환상이 아닌 현실에 뿌리를 둔 언어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번역 혹은 번안? 83-84

여전히 만연된 잘못된 번역관에서 해답의 일부를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번역은 단순한 어어적 전환의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 단계의 활동이며 첫 번째 단계에서는 주의 깊은 읽기, 두 번째 단계에서는 솜씨 있는 글쓰기를 포함한다. 번역 작품이 주어질 때 우리가 쥐고 있는 것은 한 사람의 원본 읽기 이다. 설사 그 차이점이 크지 않다하더라고 스무 명의 다양한 번역가들은 스무 편의 다양한 번역을 생산할 것이다. 왜냐하면 스무 가지의 서로 다른 읽기와 그 읽기를 글로 옮기는 노력이 포함되어 있기 떄문이다. 번역가가 원본을 해석한 것은 최종 생산물에 반영될 것이다. 게다가 그 최종 생산물은 사실상 원본의 다시쓰기rewriting일 것이다. 앙드레 르페브르가 아주 유익하게 주장했던 것처럼 말이다. 다시쓰기인 번역은 어쩃든 번역이 원본과 똑같아야 한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뛰어넘도록 도와준다. 절대로 떡같을 수 없다. 왜냐하면 언어적, 문화적 차이를 지닌 번역가의 참여가 그것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다시쓰기라는 개념 또한 우리가 번역/번안의 구분을 피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우리가 일단 한 텍스트가 ㄷ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이동할 대 무엇이 발생하는지 받아들이고 나면 번역과 번안 사이의 경계선을 세우려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스타일 번역 87

<번역과 권력> 서론에서 마리아 티모코와 에드윈 겐츨러는 번역 과정의 복잡성을 다음과 같이 깔끔하게 요약한다.


번역은 단순히 충실한 재생산의 행위가 아니라, 그보다는 선택, 모음, 구조화, 제작이라는 고의적이고 의식적인 행위이며, 심지어는 변조하고 정보를 거부하고 위조하며 비밀 코드를 창조하는 경우도 있다.




창작과 번역 99

한 작가가 다른 작가가 쓴 것을 시간을 들여 번역할 때는 항상 이유가 있다. 그것이 다른 방식의 글쓰기를 실험하는 것이든 자신의 스타일의 경계선을 확장하는 것이든 또는 단지 그 작품을 처음으로 자신이 쓸수 있었더라면 하는 바람때문이든 말이다. 다시 말해 어떤 작품을 번역하는 것은 종종 한 개인이 작가각 되어가는 과정을 밟아야 할 자연스런 단계인 것이다.





오만과 편견 104-105

번역은 어느 누구의 기준으로 봐도 높은 수준의 지식과 능력 둘 다를 내포하는 모든 종류의 기술을 필요로 하고 문학 번역은 연구가 필수적이다. 소설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읽고 그 소설가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하며 그 작가가 이용하는 스탈에 관한 기법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것은 그 작가가 쓴 다른 작품들을 모두 읽어야 함을 뜻한다. 또한 모든 뉘앙스, 모호성과 암시를 번역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그 소설을 역사적 컨텍스트에 위치시켜 놓고 해석해야 한다. 그 다음에서야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의 새로운 독자들을 위해 그 소설을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 


106

또한 내 친구는 그 시에 언급된 장소 몇 군데를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이는 지형학, 기후, 장소에 대한 일반적인 느낌을 이해하면 번역가에게 종종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번역가들은 원본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물리적 환경을 이해하려 하고, 때로는 그러한 환경을 일부라도 이해하는 데 여행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외국문학 교육의 중요성 111

외국문학 공부를 축소하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이유는 그 축소가 유럽 문학이 현재에도 과거에도 언제나 상호연결되어 있다는 사실과 위배되기 때문이다. 모든 유럽문학은 서로서로를 번역하면서 풍요로워졌다. 푸시킨에게 바이런이 없었다면, 보들레르에게 포우가 없었다면, T.S. 엘리엇과 셰이머스 히니에게 단테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언젠가 윰ㅇ한 현대 소설가가 20세기 영국 소설이 19세기 러시아 소설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앗다고 주장하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문학의 움직임은 언어 장벽을 뛰어 넘는다. 18세기 후반, 19세기 초반의 소위 영국 낭만주의 작가들은 여러 언어의 글을 열광적으로 읽었으며, 서로서로에게 아이디어, 주제, 형식을 빌리고 빌려주었다. 





시 번역상 117

시 번역에서는 아름답고 잘 읽히며 원본에 충실한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 비록 그 충실함이 정의되는 방식이 번역가의 해석에 따라 다를지라도 말이다. 위 글이 통번역 기관지 <ITI 블루틴>에 2005년 3월~4월에 쓰였을 때는 시 번역상이 막 시작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때 이후로 연례행사가 되었고 일부 수상 응모작들은 출판되어 상당한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이 상에 관한 정보는 www.stephen-spender.org에서 얻을 수 있다.





번역이 엉망이 될 때 121

영어를 말하는 곳에 사는 다수의 사람들은, 절대로 번역된 적이 없기 떄문에 자신의 의견이 남들에게 들린 적이 없었던 수백만 사람들의 분노의 깊이를 알고 깜짝 놀랐다. 이것은 물론 글로벌 영어의 확산이 가진 불리한 면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배움에 따라 더 많은 영어 원어민들은 다른 언어를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번역에 의존하며, 그 잘못될 수도 있는 번역들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언어 123-124

두개 언어 사용bilingualism에 대한 토론에 참여했을 때 나는 누군가가 훌륭한 번역가는 출발언어와 도착언어 둘 다 '완벽하게 알아야'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흥미를 느꼈다. '완벽하게 알아야'한다는 그 구절이 내 신경을 건드렸다. 결국 완벽하게 안다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좀 더 적절하게 질문한다면 우리가 두 언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 가지 언어라도 완벽하게 아는 것이 가능할까? 내 경우 잘 모르는 방식으로 쓰이거나 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떤 단어나 구를 찾기 위해 사전을 찾지 않고 일주일이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다. 그리고 나는 항상 동의어 사전을 부엌에 두고 찾아본다. 동의어 사전은 크로스워드 퍼즐에 특히 편리하다! 작가와 번역가는 그러한 참고도서가 필요한데, 그 이유는 어떠한 언어도 '완벽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기 때문이다. 


126-127

나처럼 평생 동안 똑같은 언어들은 아니어도, 머릿속에 두 개 언어가 항상 있는 사람은 어떤 부류의 두 언어 구사자냐고 누군가는 물을 수 있다. 여기 완벽한 앎이라는 것은 없고 오히려 변화하는 현실만이 있다. 게다가 우리는 나라에서 나라로 이동할 때 문화적 컨텍스트는 즉각성을 잃고 사라지기 시작한다. 요즘 나는 이탈리아에 갈 때마다 집처럼 느끼지만 포르투갈에선 편안하지만 외국인이고, 덴마크는 그저 그 나라를 열렬히 좋아하는 방문객일 뿐이다. 시간과 부재는 언어 능력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친숙한 것은 살아가면서 의미를 잃을 수 있다. 두 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불평이란, 두 언어 중 한 가지 언어를 말하는 곳에서 너무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 언어가 발전하고 변화할 때 자신들은 변하지 않고 입지를 잃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131-132

이 언어에서 저 언어로 옮겨 다니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언어들을 다른 방식으로 육체적으로 경험한다. 소리는 몸의 각기 다른 부위에서 울린다. 예를 들면, 아랫배, 가슴, 목, 머리가 있다. 나는 항상 어떤 언어가 더 편안하게 느낄수록 내 몸의 더 낮은 부분에서 목소리가 나오는 것처럼 느낀다. 간단히 말하면 언어는 언제나 육체적인 것이고 우리가 말하는 방식에는 이것이 반영되어 있다. 





여성의 번역 160

학생들이 끝없이 묻는 질문이자, 나 역시 대학생이었을 때 던졌던 질문이며 오늘날에도 자주 던지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과연 우리가 글쓰기에서 성별을 구분할 수 있는가이다. 다시 말하면 남자와 여자는 글을 다르게 쓰는가?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하는가? 익명의 글과 마주친 독자는 주제와 상관없이 글쓴이의 성별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은 번역에 대해 생각해볼때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여자가 쓴 작품을 남자가 적절하게 번역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반대 역시 질문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떤 페미니스트 번역가는 번역가와 원작자의 성별이 일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젠더와 글쓰기에 대해 확실하지 않고 입증되지 않은 추정에 근거를 두고 있는 데다 번역가의 영역을 제한시키기도 한다.


162

번역과 젠더에 대해 도발적이고 재미있는 의견들 대부분은 캐나다 번역가들에게서 비롯되었다. 나는 바바라 고다르의 말장난, 텍스트를 '부드럽게 다루기woman-handling'를 특히 좋아한다. 그 말장난은 그녀가 '겸손한 번역가를 대체하기로 표현한 것과 관련된다. 고다르와 르바인 같은 번역가들은 번역가가 작업하고 있는 작가들가 똑같은 성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을 훨씬 뒤어 넘어 번역가의 역동적인 역할과 번역의 창조성을 역설한다. 또한 번역이 특별한 기술과 이해를 필요로 하는 재창조 행위라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이는 어떤 번역도 그것이 기원을 두고 있는 원본과 똑같을 수는 없기 떄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셰리 사이몬이 젠더와 번역에 대한 연구에서 간단명료하게 번역을 '창조적 다시쓰기'로서 강조하듯이 원본이 번역보다 우위에 있다는 가정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마치 남성이 여성 위에 있다는 가정이 무너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를 통해 젠더와 상관없이 모든 번역가들이 자신의 작가적 권위를 주장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목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셰익스피어와 번역 163

그러나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언어가 언제까지나 그 우위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셰익스피어의 언어는 그의 재능에도 불구하고 현대 영어 원어민에게 갈수록 접근성이 떨어지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은 그 정전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사실 처음부터 위대한 문학작품이 되려고 쓰인 것이 아니고 당대의 재능 있고 인기 있는 배우들을 위해 조금씩 단편적으로 쓴 대사와 장면들을 합해 모아놓은 것이다. 그래서 (...)

극은 함께 일하는 것이며 늘 그래왔다. 배우, 기술자, 작가, 감독, 기획자, 후원자를 포함한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만나서 연극을 만난다. 대본은 하나의 요소이고, 희곡은 다양한 종류가 있다. (대본충실;암기-텍스트재생산/고정된 대본x협력하여 합동작품/조각조각모아 최종 출판 등)


167

극을 번역하는 것은 시나 소설을 번역하는 것과 다르다. 극 번역은 고독한 작업이 아니고 또 고독해서도 안 된다. 극의 속성은 공동협력이고 이는 이상적으로 번역가가 앙상블의 나머지처럼 그 과정에 참여해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예를 들면 피터브루크의 극이 성공을 거두었던 이유를 설명해주는데 그의 극에서 작가와 번역가는 고립속에서 일하지 않기 떄문이다. 번역가들은 배우가 어떤 것을 공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알 수 없고 오직 추측만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배우와 함께 일하면서 공연에서 쓰이는 표현들을 고치고 다듬으면 그 희곡은 활력과 흥겨움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번역가가 16세기 언어를 의미 있는 현대의 표현으로 만들기 위해 배우와 감독과 함께 나란히 작업을 했던 영어 아닌 다른 언어로 쓰인 셰익스피어 희곡에 일어났던 일이다. 






행간의 번역 170

그러나 번역은 모든 번역가가 다 아는 것처럼 단어 이상에 관한 것이다. 단어, 구 ,숙어, 속담 등의 사전 대응어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프랑스 작가 말라르메가 말하듯이 우리가 읽는 것의 행간에 존재하는 또 다른 텍스트가 있으며 이 부분에서 번역가의 능력이 가장 많이 시험받는다. 번역가들은 단어 그 훨씬 이상의 것뿐만 아니라 단어 사이의 침묵과 공간들도 다루어야 한다. 또한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함축적 의미 그리고 독자가 생각하는 단어의 뉘앙스도 다뤄야 한다. 


172

분명 침묵은 어디에서나 침묵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영국의 사회적 상황에서 침묵은 창피함을 뜻할 수도 있고, 핀터가 아주 미묘하게 표현하듯이, 협박이나 암시적 위협을 의미할 수도 있다. 영국의 저녁 식탁에서 갑자기 누군가 침묵하면 그것은 금방 무엇ㅇ 일어났거나 곧 일어날 것이다. 침묵이 이탈리아의 똑같은 상황에서발생하면 어떤 끔찍한 것이 일어난 것이고 사람들은 그 위험한 공백을 메우려 달려든다.

반대로 핀란드에서는 완전히 편안한 침묵이 있다. 헬싱키에서 저녁 먹을 때 처음으로 이러한 것을 경험했는데 처엄에는 불편했지만 곧 북유럽 국가에서 침묵은 사교상 용인될 수 있고 매우 기분 좋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때로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야한는 의무감 없이 친구들과 함꼐 조용하게 식사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핀란드, 영국, 이탈리아의 사회적 상황에서 갑작스런 침묵의 의미는 크게 다르고 몸으로 느껴질 만큼이나 그 차이는 크다.

번역가가 주목해야할 점은 침묵은 문화마다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 밖, 예를 들면 일본과 같은 아시아 국가에서 침묵은 존중을 뜻할 수 있고, 종종 침묵은 젠더와 관련되는데, 남자가 여자보다 더 크게 얘기한다.





극번역의 특징 178

극 번역을 번역학 연구자들이 그렇게 홀대를 한 이유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시나 소설과 다르게 연극은 그것 자체로 목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청사진으로 궁극적 공연에 선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번역가의 임무는 이미 완성된 작품(희곡)이면서 무대 위에서 최종적으로 현실화되는 여정의 중간 역에 놓인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번역된 희곡은 이중의 청사진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한 컨텍스트에서 공연을 위해 쓰인 희곡과 또 다른 컨텍스트에서 공연되기 위해 가는 여정에 있는 텍스트, 이 둘의 번역으로서 존재함을 말한다.






번역에서 얻는것 192-193

시나 희곡, 소설을 번역할 때면 나는 내 손이 종이 위에서 감당할 만큼의 속도로 초벌 번역을 대충 휘갈겨 쓴다. 맞다, 나는 손이라고 말했다. 이유는 나의 경우 초벌 번역은 종이에 펜으로 쓰면서 옜날 방식으로 한다.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그것을 어떻게 가장 훌륭하게 번역할지에 관한 야침탄 고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를 마주칠 때마다 괄호를 치고 계속 쓴다. 사전에서 단어를 찾으려고 중간에 멈추지 않는데, 왜냐하면 초안은 사실 읽기의 기록이며, 그 읽기는 최종본의 기초를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첫 번째 작업 단계의 결과물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이 휘갈겨 쓴 페이지이겠지만, 그 초안에서 나는 외국 언어로 된 텍스트를 읽는 것과 동시에 영어로 번역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그런 모든 종류의 흥미로운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나는 구조적인 문제들, 즉 해결해야 하겠지만 독자를 위해 적절하게 번역하는 데 ㅁ낳은 노력이 필요한 문제들이 보이고 흐름이 자연스럽고 때로는 여기저기 살짝 수정하는 것 말고는 전혀 수정하지 않아도 최종본이 되는 구절이 보이며 때로는 원본이 '흔들리는' 곳, 아마다 원저자가 그 지점에서 자신의 글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지점이 보이기도 한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중의성을 가지려고 하는 지점이며 그 중의성이 도착언어로 번역될 수 없으면 어려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번역은 차선이라고, 즉 중요한 면에서 어떤 식으로든 부족한 것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짜증이 나는 이유는 그들은 번역가가 독자 및 편집자(개작가)의 일을 동시에 한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떄문이다. 일부러 나는 '편집자'라는 말을 썼는데 번역은 편집이라고 표현될 수밖에 없는 그런 결정을들을 포함하는 일을 실제로 하기 때문이다. 






계절묘사와 번역 200

우리는 'monsoon(장마)'이라는 단어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지만 경험하지 않았다면 monsoon의 시작과 함꼐 오는 그 특정한 감정의 상태나 그것이 늦게 오거나 오지 않을 때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열대지방에서 해가 질 때 갑작스럽게 캄캄해지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땅거미가 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약간은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낮도 밤도 아닌 중간지대의 시간이 커다란 상징적 힘을 지니는 문화권에서 땅거미가 질 무렵의 그 감정적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201

물론 번역하기 위해서는 번역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직접 경험을 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경우는 결코 없으며 말도 안되는 말이다. 게다가 요즘은 인터넷이나 핸드폰 등 단추만 누르면 이용할 수 있는 시각적 이미지가 있어서 우리는 다른 계절과 장소를 상상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계절의 차이를 보여주는 예시는 번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를 드러내는데, 그것은 비록 어떤 단어와 개념이 쉽게 다른 언어로 번역되고 사전적 대응어가 있다 하더라도 특정 문화에 깊이 고정되어 있는 추가적인 의미의 층은 번역이 불가능하는 것이다. 번역이 단지 단어에 관한 것이라고 새각하는 사람은 누구든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번역은 종종 단어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2

문화번역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호미 바바는 문화 간 협상의 어려움을 설명하기 위해 날씨 묘사를 이용한다. 영국의 날씨 이미지를 불러오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백악과 석회석으로 만들어진 '역사가 깊은' 나라의 기억을 불러온다. 누빈 것 같은 언ㄷ거, 바림이 위협하는 황야, 조용한 성당의 도시, 영원히 잉글랜드이면서 낯선 그 들판의 모퉁이와 같은 기억들을. 영국 날씨는 또한 반신반인 다이몬의 이미지 즉, 인도의 열기와 먼지, 아프리카의 어두운 공허함과 같은 이미지를......불러일으킨다. (Bhabha, 990: 319)


고정관념은 또 다른 종류의 아주 다른 고정관념을 야기한다. 바바에 따르면 그 다른 고정관념은 그런 곳으로 가는 사람들의 눈에 이상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바바의 이런 주장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화에 결부시키는 상징적, 실제적 의미덩어리를 말하고 있다느 ㄴ점에서 흥미롭다. 어떤 문화의 특징도 날씨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

번역은 언어 경계를 가로지르면서 이해하기 힘든 상당히 많은 것들과 부딪히며 큰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동시에 그것이야말로 번역을 아주 흥미있게 만들기도 한다. 번역가가 번역을 잘하면 독자는 다른 세상에 눈을 뜨고 그리하여 그들의 삶은 충만해질 수 있다.





여러 번역본 비교의 가치 204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번역관련 서적 중의 하나는 바인베르거의 <왕유를 바라보는 열아홉 가지 방식>이고 부제는 '어떻게 중국시가 번역되는가'이다. 여러 번역을 비교하는 이 뛰어난 연구에서 바인베르거는 중국시의 대가 왕유의 4행시의 다양한 번역을 제시한다. 


207-208

가장 강한 임팩트를 만드는 번역은 무엇인가라는 측면에서 볼 때 바이베르거와 나는 게리 스나이더의 1978년 작 번역을 선택하였다. 스나이더는 깊은 숲 속에 비치는 햇빛의 번쩍임에 대한 미국의 현대 이미지즘 시를 창조하였다. 그는 산과 숲을 이해하고 그러한 풍경의 직접적인 경험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원저자가 수세기 전에 본 것을 보았을까? 보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싶다. 비록 번역이 변화에 관한 것이지만 또한 지속성에 관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 스나이더의 왕유 번역이 있다.


Empty mountains:

No-one to be seen.

Yet-hear-human

sounds and echoes.

Returning sunlight

enters the dark woods;

Again shining

On the green moss, above.


바인베르거는 마지막 전치사 'above'를 이해하기 어려워서 스나이더에게 설명해달라고 편지를 썼다. 스나이더는 답장에서 깊은 숲속 이끼가 나무 위 높이 자라고 있고 왕유는 땅 위의 돌에 이끼를 미추며 햇빛이 내려오는 것을 상상하지 않고 나무 위 높이 빛이 있는 것을 상상한 것이라고 말했다. (...) 

시의 끝에 'above' 단어를 전경화하여 스나이더는 독자가 상상의 숲에서 그리고 은유적인 측면에서 위를 보도록 한다. 그리하여 그 장면의 신비스런 차원을 암시한다. 그것은 영단어 하나가 어떻게 중국어 한 문자의 힘을 반영하는지 보여주는 구체적인 실례이다. 

 

*<鹿柴> 王維 

空山不見人 

但聞人語響 

返景入深林 

復照靑苔上 


빈 산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사람의 말소리만 울려 오네.

노을 빛이 숲 속 깊이 들어와

다시 푸른 이끼 위로 비치네.





언어와 놀이 209-210

번역가들은 글을 잘 쓸 수 있어야 하고 무엇을 번역하든 그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 잘 읽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독자를 도와주기 위해 추가적인 지식을 많이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번역이라는 그 진지한 지적 작업을 강조할 때 종종 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번역은 재미있다는 점이다. 언어는 무한하게 유연하며 번역가는 한 가지 언어 이상의 유연성을 가지고 실험할 수 있다. 


211

훌륭한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해석하고 이해하고 언어와 노는 것이 필수적이다. 


213

언어를 갖고 노는 문화 사이의 회고록 현상은 새롭고 번역이 그러한 작품에서 이용되는 방식도 새롭다. 샌디 밸푸는 아프리칸스어 농담을 하고 곧바로 영어 번역이 따라 나오지만, 다른 곳에서는 그 이상한 아프리칸스어 단어가 번역되지 않는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의도적으로 장난의 수준에서도 독자를 참여시킨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의 낯설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번역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단어들이 무슨 뜻을 가질지 상상할 수밖에 없다. 단어가 번역되면 번역가처럼 우리는 두 개의 유사한 세계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어떤 것을 표현할 때 한 가지 이상의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뉴스번역가218

나는 그 세미나에서 언급된 잊을 수 없는 구절을 적었다. '뉴스에이전시는 번역을 벗어날 수 없다.' '수만 개의 단어가 매일 매시간 세계 도처에 돌진하고 있다.' '번역은 우리가 어느 정도로 문화관련 문제와 직면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번역은 단순히 단어를 번역하는 문제가 아니다.' '번역은 단지 줍ㄴ에 난 길이 아니라 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길이다.'

번역가들의 힘든 선택, 항상 누구도 기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세계적인 것을 지역적인 것으로 옮기고 또 그 반대로 옮기는 근본적인 문제, 상황 밖의 사람들이 마음의 결정을 내리도록 선동적이지 않으면서 중립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우리는 세미나에서 들었다.


219

우리가 처음에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제기했던 질문이 있다. 왜 뉴스를 전 세계로 전파하는 일에 번역이 근본적으로 중요한데 번역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인가? 위 프로젝트의 근간을 뒷받침하고 있는 질문이다. 





정확히 뭐라고 사담이 말했죠? 221

정부가 언론의 자유에 간섭하는 나라에서 우리는 똑같이 분노를 느끼는데, 언론의 자유와 진실은 함께 가기 때문이다.

2003년 나는 <인문계열 연구 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워릭대학교에서 국제 뉴스 생산에서 번역이 맡는 역할을 조사하는 연구프로젝트를 총괄하였다. 우리의 프로젝트 제목은 '글로벌 미디어 번역의 정치와 경제'였고, 목표는 번역이 언어적, 문화적 경계를 가로질러 뉴스를 전파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조사하는 것이었다. (...) 왜냐하면 한편으로 번역은 전 세계에서 뉴스를 전파하는 데 근본적인 역할을 하고 끊임없이 국제 방송을 요구하는 시대에서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번역을 아주 다르게 정의하고 아주 다른 번역 관행이 작동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한 언어로 쓰인 것을 다른 언어로 한 줄 대 한 줄로 번역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그렇게 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또한 불필요하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종종 원본을 합쳐 놓은 통합 형태의 번역이다. 그래서 번역 과정에서 리포터는 요약하고 최종 결과물이 독자의 기대를 충족시키는데 필요한 스타일 관련 수정을 한다.


227

그러나 어찌되었든 아랍어로 진행된 법정 청문회 대화를 글로 옮긴 기록의 두 영어 번역을 우리는 갖고 있고 두 번역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편집되어 있다. 다양한 요소들이 가득한 번역의 전체 과정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말에서 글로, 아랍어에서 영어로, 전체 길에서 단축된것으로, 초본에서 특정 독자층에 맞춘 언론사 고유의 스타일로 다양한 차원의 번역이 잇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도 우리는 최종 결과물이 영어 독자에게 진실하고 정확한 번역이라고 받아들일 것을 요구받지만 이 모든 과정에는 조작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소수언어의 생존과 번역230

번역은 새로운 문학 모델을 제공하였고 최근에는 기술번역, 관료번역으로 인해 어휘와 문법의 영역이 넓어졌다. 종종 주장되듯이 번역은 비주류 문화를 강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번역의 양상이 있다. 마이클 크로닌이 <번역과 세계화>에서 지적하듯이 비주류 언어와 주류 언어 사이에 힘의 불균형 관계가 존재하고, 그러므로 번역은 일반적으로 단일 방향이고 힘이 약한 언어는 다른 언어에 휘둘리지 않는 지배적인 언어로부터 많은 것을 흡수한다.


231

그러나 모든 것을 감안하면 번역은 대부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켈트언어들이 살아남은 것이 그 분명한 증거이다. 공공시설에서 두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전략의 중요성 또한 의미가 있다. 두 언어로 된 지명을 보고 두 언어로 된 도로 표지판과 공지문을 읽으면서 어떤 면에서 우리는 인식의 차이를 어느 정도 받아들인다. 똑같은 도시나 마을에 두 개 이름이 존재할 수 있음을 그저 인식하는 것만으로 똑같은 것을 바라보는 방식이 하나 이상임을 알게 된다. 단일 언어 구사자들이 처한 큰 위험은 그런 종류의 인식의 결핍이다. 다시 말해 문화는 다르고 언어적 다양성은 역사의 기형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식의 일부임을 그들은 꺠닫지 못한다. 


232

차이를 인식하는 것은 타자와 더불어 살고 있는 다른 행동과 다른 가치관들을 수용하기 위해 타자를 이해하기 위한 첫 번쨰 발걸음이다. 어떤 다른 이유보다도 이것이야말로 아이들이 다른 언어를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언어를 가르치는 목적은 학생들이 영어가 십중팔구 통용되는 다른 나라에서 기차표를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한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이 항상 다른 언어로도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시키고, 각 언어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으며 따라서 번역에는 협상과 타협이 포함되어 있음을 이해시키는 것이 바로 외국어교육의 목적이다. 





이름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234

그러나 공항 리스트의 장소 수가 더 중가하는 것 외에도 또 다른 중요한 변화가 진행중이다. 그것은 바로 장소의 이름을 다시 짓는 것이다. 뭐랄까, 수십 년 간의 식민지 상업을 통해 만들어진 국제화된 이름에서 멀어져 더 지역적인 명명법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북경은 전세계에서 베이징으로 지금은 알려져 있고, 마드라스(인도 동남부의 주)는 센네이가 되고, 붐베이는 뭄바이로 알려져 있다. 지명을 다시 아프리카 식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예를 들면 전에는 로디지아였던 것이 지금은 짐바브웨가 되고, 니아살랜드가 지금은 말라위가 되고, 프랑스령 수단은 지금 말리가 되었다. (...)

그러한 변화는 지명이 정치적인 면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238

다양한 시기에 어떤 장소가 유명해지면 틀림없이 그 장소의 이름을 번역할 것이다. 그런 장소는 수도, 항구, 상업 중심지, 바다, 강 또는 심지어 산이 될수도 있다. 예를 들면 템즈강은 이탈리아어로 타미기이고, 반면 로마의 테베레는 영어의 타이버이다. 이름 짓기의 정치적 차워 ㄴ말고도 중요한 상업적 역사가 있고,  어떤 장소가 어떻게 다른 시기의 다른 분화에서 뜨고 지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종종 나를 매료시킨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은 이름을 짓고 다시 이름을 짓는 것은 순수한 것이 아니라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고개를 들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때로는 해방의 행위로서 그러나 또한 유감스럽게도 억압이나 문화적 전유의 행위로서 일어난다. 애ㅗ 지명이 변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움직이고 있는 이 세상을 이해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요리와 번역 240

현지 식물과 동물의 이름을 번역하는 일은 악명 높을 정도로 힘들다. 생선 이름은 특히 나에겐 힘든 것인데, 너무 많은 생선이 특정 지역에만 나기 때문에 현지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이 부분적인 이유이고 또 다른 이유는 종종 똑같은 생선이 다른 요리습관과 식습관 때문에 이름이 다르게 지어지기 때문이다. 오늘날 다행히도 번역가들에게는 식물과 동물에 대한 다양한 언어로 된 훌륭한 데이터베이스가 있고, 인터넷에서 사용 가능하며, 거대한 특수용어 사전이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의 하나는 <다국어 다문자 식물 이름 데이터베이스Multlilingual Multiscript Plant Name Database>이고, 그것은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이 놀라운 번역 보조도구에도 불구하고 음식 번역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여전히 있으며, 이것은 일반적으로 언어 간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와 연결된다.





가족 호칭에 관하여 245

이혼은 어떤 면에서 몹시 슬프지만 가족을 확대하는 효과도 있으며 더 많은 관심과 우정을 많은 이들의 삶에 한 아름 가져올 수도 있다. 아마도 우리가 사는 변화하는 세상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단어들이 곧 생겨날 것이다. 비록 영어가 가족관련 용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영어에 이러한 일이 생겨날 거라고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말이다. 


247

가족 용어, 그 기원과 중요성에 관한 거대한 문헌이 존재한다. 가족 구성원의 역할과 지위를 서술하는 데 이용되는 용어의 범위는 특정한 사회가 형성되는 방식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많은 언어들은 조부모,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등과 같은 직계 가족을 가리키는 용어의 존재에 대해 비슷한 점이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면 언얻르은 서로 굉장히 다르다. 어떤 언어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쪽에 나이 많고 적은 형제자매를 구분하면서 나이에 따라 가족구성원을 지칭하는 분명한 용어가 있다. 헝가리어는 19세기가 되어서야 형제자매를 전반적으로 가리키는 용어를 개발했던 것 같다. 그러나 형제자매의 출생 순서에 따라 정확한 구분을 하였다. 마찬가지로 중국어도 형제자매의 위치를 찾느 ㄴ다양한 용어들이 있다고 들었다. 예를 들면 일곱 번째 아들, 세 번째 어린 삼촌 등등. 영어로 번역하면 이 용어들은 느슨하게 이름 붙여진 uncle, aunt, cousin이 될 것이며, 영어는 전통적인 중국 사회에 다르게 수나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것 같지 않다. (...)

네와르어 가족 용어가 관한 무척 재미있는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네와르어에는 '어머니의 아버지의 남동생'과 '할머니의 남자형제의 아내', 심지어는 '애인과 야반도주한 어머니'와 자신의 '아내가 애인과 야반도주한 아버지'처럼 모든 것을 구분한다. 이런 종류의 언어구분이 우리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흥미로운 생각거리이다.





이론과 실제 다시 생각하기 254

이론은 이쪽 방, 실제는 저쪽 방 따로따로 있는 때를 상상해 본적이 없다.

얼마 전에 나는 라디오에서 훌륭한 문학비평가인 프랭크 커모드가 이론과 문학 실제 사이이 관계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따.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문학을 이론적으로 처음 접근하였던 커모드 교수는 시계의 추가 너무 멀리 가서 오직 '이론만 하고' 싶고, 작가의 실제 작품은 애써 읽으려 하지 않는 학생들을 만난 이야기를 했다. 그가 찾은 해결책은 자신이 강의했던 초창기 시절로 돌아가 학생들이 실제 작가의 실제 작품을 읽고 토론을 했던 이론 없는 세미나를 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급진적인 접근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누리는 자신의 인기를 보고 그는 누군가에게는 구식인 접근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 문학 연구를 발전 시키는 가장 좋은 방식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몇 년 전 나 역시도 똑같이 했음을 깨달았다.

번역 이론이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일자리를 잃고 몇 십년 걸친 연구를 부정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론과 실제를 연결시키는데 그리고 번역가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어떻게 설명하고, 학자들이 어떻게 번역을 분석하는지 이해하는데 더 많은 생각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더 가까운 연결을 보장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이론가들 역시 번역을 더 많이 하는 것이다. 





시와 번역 261

조카의 사망 시간을 자신의 번역에 덧붙임으로써 발머는 그 시가 읽히는 방식을 바꿔 놓았다. 발머는 이것을 '새로운 상황에 놓기recontextualization'라고 불렀고 그것은 새로운 목적에 도움이 되도록 번역을 다시 작업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여전히 번역인 것을 말한다. 그녀는 아킬레스와 프리아모스 왕의 화해를 그린 <일리아드>의 한 구절을 마이클 롱리가 비슷한 방식으로 새로운 상황에 놓은 것을 인용한다. 그 화해는 1990년 초 북아일랜드의 평화 회복 과정을 반영한다. 롱리는 현재에 대해 글을 쓰기 위해 번역을 통해 고대인에게 돌아가는 시인의 또 다른 본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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