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책장

<씨앗건강법> 그리고 <내가 바라는 세상>

 잔잔 2014. 6. 19. 16:15

씨앗 건강법

 

노명순

 

문짝 떨어지고 기왓장 날라가는 것이 꼭 실밥 툭툭 터져버린 이불호청 같은 집이여. 그란디, 이 작것이 요새는 새댁 꽃이불 꿰메 놓은듯 개나리꽃앵두꽃살구꽃, 색색을 골고루 다 피우며 한참 물이 올랐더랑께, 또 겨우내 닭오리거위새끼들 씨알갱이 하나 귀경 못했는디, 따땃한 봄된께 울타리, 말캉, 폭신 옴팍헌디만 보면, 누가 보거나 말거나 아랫도리 까고 소락대기 지르며 희고 둥근 씨앗을 대책없이 질질 흘리고 다니는 것이 참말로 가관이더란 말이여, 다 살은 듯 얼음 백혀 자빠졌던 파배추밭도 연초록 여린 대궁 뾰족이 밀고 나오는 것이, 오메! 요 이쁜 것들! 막말로 지난 시한에는 요놈의 집구석 이사를 가볼까, 때려 부숴볼까, 허는 맴도 먹었는디, 인자 봄도 왔응께 기냥 저냥 양단 꽃이불 속인양 뒤집어쓰고 살아야 쓰것구만 아 금매 엊그제부터는 요 작것이 당최 젊어지려고 작정혔는지 씨앗을 몽땅 베자루에 담어 베개를 맨글더라고, 그라더니 밤된께 대들보에 떡하니 베고 곤히 잠들며 춘정까지 꿈꾸는거여, 고것이, 거시기, 거, 뭐시더라, 맞아, 씨앗 건강법이라나?

<현대시학, 98 7월호>

 

 

 

 

상일동으로 이사온 집은 용산동에서의 집보다 무려 10평이상 크다. 방도 세개고 샷시도 새거라 우풍도 없다. 한쪽으론 세탁실겸쓸 수 있는 배란다도 트여있고 장판도 벽지도 모두 새거다. 넓은 거실에서 이음이는 마음껏 기어다니며 논다. 그런데 날이 따뜻해져서 산책을 하고 들어오면 4층 건물의 세개의 문을 지나야하는 집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문득 옥상텃밭생각도 나고 우풍도 생각나고 현관문을 활짝 열면 바깥이 훤히 보이곤 했던 게 생각나고 그런다. 역시 난 아파트체질이 아닌갑다. 산책하다 보이는 2,3층 주택들이 좋아 보인다. 복도같은 게 없고 바로 나오면 바깥인 집들말이다.

 

 

저 시를 보고는, 아,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 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집은 작지만 바로 나오면 흙마당이 있고 작은 텃밭도 있고 가축들도 돌아다니고 색색이 꽃피는 집이라니! 아 상상만 해도 좋다. 그런 집에서 씨앗이 가득담긴 베자루 베개를 베고 햇볕아래 낮잠 한숨자고나면 불면증같은 것도 뾰루지같은 것도 다 날아가 버릴 것 같아.

 

 

그리고 그런 집에 살면서 꾸무럭꾸무럭 이런 일들을 한다면 어떨까.

 

 

 

 

 

내가 바라는 세상

 

이기철

 

이 세상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 가에 꽃모종을 심는 일입니다

한 번도 이름 불려지지 않은 꽃들이 길 가에 피어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꽃을 제 마음대로 이름지어 부르게 하는 일입니다

아무에게도 이름 불려지지 않은 꽃이 혼자 눈시울 붉히면

발자욱 소리를 죽이고 그 꽃에 다가가

시처러 따뜻한 이름을 그 꽃에 달아주는 일입니다

부리가 하얀 새가 와서 시의 이름을 단 꽃을 물고 하늘을 날아가면

그 새가 가는 쪽의 마을을 오래오래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 마을도 꽃처럼 예쁜 이름을 처음으로 달게 되겠지요

그러고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이미 꽃이 된 사람의 마음을 시로 읽는 일입니다

마을마다 살구꽃 같은 등불 오르고

식구들이 저녁상 가에 모여앉아 꽃물든 손으로 수저를 들 때

식구들의 이마에 환한 꽃빝이 비치는 것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어둠이 목화송이처럼 내려와 꽃들이 잎을 포개면

그날 밤 갓 시집온 신부는 꽃처럼 아름다운 첫 아일 가질 것입니다

그러면 나 혼자 베갯모를 베고

그 소문을 화신처럼 듣는 일입니다

<시와 사람, 2000 봄호>

 

 

 

 

요즘 <풀들의 전략>이란 책과 <꽃, 들여다보다>란 책을 슬몃슬몃 보고 있는데

그러니까 더더욱 꽃이며 풀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전에는 그냥 예쁘고 좋고, 향기랑 냄새가 몸과 맘을 상쾌하게 하고 그래서 좋았는데 이제 풀과 꽃 하나하나들의 이름과 그 사연과 삶이 너무 멋지다. 작은 꽃밭을 가꿔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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