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프로젝트의 벽

<순성장거> 서울성곽길 걷기(2013년 12월 29일-2014년 1월 15일)

 잔잔 2014. 6. 20. 00:50

2014년 1월 6일 월요일.

겨울방학을 맞은 쌩쌩과 임신 35주차를 맞은 나와 뱃속에 여울 그리고 19개월된 이음이가 서울성곽걷기를 하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순성장거는 서울성곽길을 돌아보는 장대한 계획이라는 말. 장거와 프로젝트는 비슷한 말이니 순성장거프로젝트는 동어반복이네^^;)

 

우리집 거실에 있는 한쪽 벽, 바로 프로젝트의 벽이다. 여기에 전지를 붙이고 함께 할 것들에 대한 계획이라던가 정보같은 것들을 적어 나간다. 첫번째는 순성장거巡城壯擧다. 1916년 5월 14일 매일신보에 함께 성을 돌아보자고 글이 실렸다. 순성장거는 그 기사에 나온 말이다. " 고대하시던 순성장거는 오늘 14일 오전 7시 30분 남대문 소학교에 모였다가 8시 남대문에서 출발하는데 회비도 필요없고 점심만 휴대하면 어느 누구라도 마음껏 참가할 수 있습니다.(순성의 즐거움, 13)" 기분이 묘했다. 지금도, 예전에도, 더 옛날에도(유본예(1777-1842)의 <한경지략>에 순성놀이에 대한 글이 있단다) 사람들이 걸었을 성곽길을 걷는다 생각하니 뭔가 그 역사에 나도 하나 보탠다는 알수없는 뿌듯함이랄까, 뭐라고 해야할까, 흠. 여튼 그래서 우리도 '순성장거', 장대한 계획이라 이름붙였다. 우리는 <순성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보며 계획을 세우고 움직였고, 다녀와서는 <옛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라는 책을 보며 마무리했다. 개인적으론 <순성의 즐거움>보다 <옛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가 더 재밌었다.

 

 

서울성곽길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있다.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숙정문(북대문)이 4개의 대문, 사대문이고, 광희문, 남소문, 서소문, 창의문이 4개의 소문, 사소문이다. 그리고 성곽길을 걷다보면 4개의 산과 만난다. 남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우연히 그리 된 것은 아니고 풍수지리학의 영향을 받아 성을 만들고 성곽을 쌓았기 때문일 거다. 또 외부로부터 성을 보호하는데도 산으로 둘러쌓여있는 곳이 좋을테니. 아무튼 아침 일찍부터 시작하면 저녁 늦게까지 하루 안에 서울성곽길을 다 걸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임산부와 어린아이가 있었으므로 2박3일의 일정을 잡아 동대문에서 시작해 시계방향으로 천천히 돌았다. 다녀와서 바로 기록해두었다면 더 생생한 이야기를 남길수 있었겠지만 이미 반년이 지나버렸기에 다이어리에 끄적여둔 단편적인 생각들과 사진으로, 흐려져가는 기억들을 붙잡아 두려고 한다.

 

 

 

첫번째. 어떤 공간에 존재하는 다양한 시간의 결을 느끼는 순간

 

우리 답사를 해보자! 이런 건 아니었다. 그냥 쌩쌩에게 방학이 왔고 뭘하며 지낼까 얘기하고 있었다. 여울이 임식막달이었던 나는 매일 동네 산책이나 했으면 좋겠다했지만, 쌩쌩이 그럼 서울성곽걷기는 어떻겠냐고 해서 그것도 좋다고 시작했던 것이다. 좋아! 순산을 위한 순성이닷! 준비하는 동안이 참 신났다. 책찾아보고 자료찾아보고 그림그리고. 그런데 자료로만 읽다가 딱 흥인지문앞에 서는 순간 정말로 역사가, 과거가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공존함을 느꼈다! 지나간 시절들이 그냥 지나가지만은 않았음을 느꼈다, 온 몸으로. 더불어 세계의 거대함을 느꼈다. 물리적인 거대함이라기보다..음 뭐랄까, 여기에 우리만 있는 게 아님을 느낌으로써 느껴지는 거대함(뭐래는거지). 아무튼 그걸 느끼는 순간, 나는 정말 한없이 작은 존재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했다. '내가 더 컸다!' 무슨 말이냐면 어떤 공간에 존재하는 다양한 시간의 결을 느끼는 순간, 나는 한없이 작아지지만 그걸 느끼는 순간 한 생명체로서의 성장이랄까 성숙이랄까 진화랄까, 그런 게 이루어진다는 거다.

그렇다면 왜 서울살면서 그간 여러번 보았던 동대문에선 그런 걸 못느꼈던걸까. 결국 알면 사랑하게 된다는 그 얘길수도 있겠지만, 조금 안타깝기도 하다. 시간을 들여 동대문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없었던 지나간 시절과 나의 감수성의 한계가 말이다. 아무튼 이로써 나는 역사를 배우고, 옛이야기를 즐겨야 하는 이유를 한 가지 더 체득한 셈이다.

 

광희문.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단면은 성곽이 이어져 있었을 도로위를 상상하게 해준다.

 

역시 도로로 인해 끊어진 성곽의 모습이다.

 

서울시는 서울성곽길 복원을 꾸준히 하고 있다. 금방 찾을 수 있는 표지판도 많다. 쉽게 따라 걸을 수 있다.

 

복원된 숭례문 성곽의 단면. 나는 순성길에서 끊어진 성곽단면에 마음이 쓰였는지 계속 그런 사진들을 찍었던 것 같다.

 

예전에 성곽으로 이어져있던 곳임을 표시해놓은 인도. 쌩쌩과 이음이 서있는 길 위로 성곽이 있었다는 거다.

 

끊어진 성곽을 이렇게 복원해둔 곳도 있다.

 

 

서소문이 있었던 서소문터. 사라지거나 끊어진 대부분의 문과 성곽들은 도로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성곽을 좀 더 피해서 도로를 만들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 터에 살았던 사람들이 죽고 또 새로운 사람들이 태어나 살아가는 자연의 순리대로 건축물도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게 당연할테니 말이다.

 

사진 속 성곽에서는 조선 초 처음 만들어졌을때부터 현대 복원에 이르기까지의 돌들을 모두 볼 수 있다. 진짜 신기하다. 600년정도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600년의 시간을 품은 돌들앞에서 26년의 시간을 품은 나는 작아지고 커진다. 

 

 

 

두번째. 걷는 여행 그리고 옆지기의 새로운 모습 발견 

 

19개월된 아이와 만삭의 임산부가 함께 걷는 여행을 하다보니 어려움이 많았다. 천천히 가는데도 쉴곳, 낮잠재울 곳을 찾아야했다. 힘들다고 징징울면 안아서 걷기도 하고 산을 지나갈때도 역시 쌩쌩은 이음이를 안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걸으면서 하는 여행은 생각할 것들과 질문들을 던져준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목적없이 거닐며 찬찬히 살펴보는 수업이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살펴보며 생각한 것들, 떠오른 질문들을 발표하는 거지. 음 재밌겠다. 아무튼 걷는 여행은 정말 좋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모두 성장할 기회를 준다.

그리고 더불어 함께 하는 이의 새로운 모습들도 발견할 수 있다. 그말은 즉 반대로 나의 새로운 모습도 볼 수 있다는 것! 걷는 여행은 힘들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기도 좀 어렵기 때문이다. 2박3일만 해도 그런데, 더 오래한다면 어떨까! 와우! 언젠가 때가 오면 내 동력으로 하는 긴 여행을 해보고 싶다.

 

나는 이 여행길에서 쌩쌩의 새로운 두가지 모습을 봤다. 하나는 그의 집념이다. 흥인지문안내소에서 사대문에 설치된 4개의 스탬프를 모두 찍어오면 성곽완주배지를 준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스탬프를 찍었다. 그런데 북악산중턱에 있는 숙정문의 스탬프가 문제였다! 오후에 출발에 힘겹게 스탬프찍는 곳에 도착했는데, 글쎄 문이 닫혀있는 것이었다. 유일하게 숙정문스탬프만은 정해진 시간에만 찍을 수 있다. 그 사실을 몰랐던 우리는 힘겹게 올라갔다가 해가 어둑어둑져가고 있어 급히 내려와야했다. 하지만 쌩쌩은 여기서 포기할 순 없다며 갑자기 담을 넘었다. 나는, 그깟 배지가 뭐라고, 옆에서 터지는 웃음을 흘리며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하지만 결국 그 안에 계신 분에게 걸리고 말았다. 문화재훼손은 큰벌을 받는다는 경고도 있었는데..지금까지 지내면서는 한번도 본적없는 모습이었기에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결국 다음날 아침 일찍 쌩쌩은 혼자 숙정문에 올라 스탬프를 찍어오고야 말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음이까지 포함해서 성곽완주배지3개를 받았다!

두번째는 듬직함이다. 보통 그는 한계에 달할때까지 에너지를 쓰지 않는 걸 지향한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적절히 일하고 활동하는 편이다. 그래서 그점이 대단하다(나는 그게 정말 잘 안되서..) 생각되기도 하고, 어떨 땐 얄밉기도 하고 그랬다. 그런데 여행길에서는 힘들어도 평소보다 에너지 업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듬직했다. 본받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이음이를 안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쌩쌩의 모습. 계단아래로 불켜진 삼청각이 보인다.

 

(아..스탬프......휴. 야속한 서울의 밤이로고)

 

만삭의 엄마와 이음이. 이음이는 둘째날 감기에 걸렸지만 그 다음날 툭툭 털어버렸다. 그 뒤로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다. 다리에 알통도 생겼다. 이음이 몸에 새겨진 2박3일의 순성^^.

 

 

 

세번째. 문과 돌담의 아름다움

 

서울성곽걷기를 하면서 내 삶에도 들여놓고 싶은 것들을 두 가지 찾았다. 하나는 문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돌담이다. 사대문과 사소문은 모두 성곽길 안쪽에 있는 궁으로 들어오는 문이다. 경복궁이나 덕수궁, 창덕궁등 의 궁도 유명하지만 숭례문은 국보1호고, 다른 문들도 오래도록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다. 그런데 왜 문이 유명인사가 된 걸까. 아마 아름답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문을 아름답게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막연히 상상해본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을 예쁘게 하는 건 사람들의 오고 감, 들고 낢을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렇담 나도 그 마음으로 문을 예쁘게 만들고 싶다. 화려하고 웅장하게 한다는 건 아니고 정성껏 가꿔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이 한번씩은 돌아보게 하는 그런 문을 말이다.

 

두번째로 돌담을 꼽은 건, 여행중에 본 돌의 의외의 특징때문이다. 무겁고 단단하고 꽉막힌것 같지만, 그것들을 모아 담을 쌓아두니 의외로 틈이 많이 생긴다. 틈이 많다. 나는 틈이 많은 게 좋다. 다른 것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 구멍, 여유...뭐 그런 걸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돌담틈 사이로 자란 풀들이나 이끼도 멋지다. 또 천천히 시간의 흔적을 담아내가는 빛깔도 좋다. 물론 집을 만든다면 담을 쌓을지 안 쌓을지도 아직 생각해본적은 없지만, 여튼 돌담은 멋지다.

 

담은 왜 쌓는 걸까. 지킬 것이 있고, 구분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겠지. 담을 쌓다. 좋지 않은 뜻의 관용어지만 그런 걸 떠나, 돌담은 멋졌다.

 

저마다 빛깔이 다른 돌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돌담 틈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 무슨 식물인지 모르겠지만 침착한 돌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더 빛나는 거 같다.

 

 

 

 

마무리

 

역시 무슨 일이든 거의 다 해갈 때가 제일 힘들다. 해질무렵이 제일 어둡다고 하더니. 낙산에서 내려와 1박2일만에 다시 눈앞에 보이는 흥인지문을 두고 떼는 발걸음이 가장 무거웠다(누가 들으면 국토순례라도 한줄 알겠네). 이음이도 지쳐 잠들어 아빠 품에 안겨 흥인지문에 도착했다. 그리고 우리의 서울성곽걷기는 끝났다.

서울성곽길을 걸으면서 서울성곽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의 모습도 보고 느꼈다. 동대문시장도 지나고, 재개발하고 있는 철거현장도 지나고, 외국인이 많은 종로거리도 지나고, 청와대앞도 지나고... 뭐라고 정리할 수 있는 말들은 없다. 하지만 매캐하고 답답한 현실의 공간들이 마음에 남았다. 아주아주 옛날의 중국왕들은 자기가 다스리는 지역을 직접 돌아보다 죽기도 했다는 얘기가 생각났다. 물론 자기발로 걷진 않았겠지만. 공무원들이나 정치인들이 자기가 일하는 지역을 걸어다니는 도보여행같은 걸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뭔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해서. 걸으면서 생각도 좀 하고. 아이고 마무리가 이상하네. 나부터 잘해야지, 암! 뭔지 모를 복잡한 일들을 대신 해달라고는 투표하지만 의존하진 않을거다. 많은 걸 기대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렇다. 내가 내 주변의 사람들과 아웅다웅 투덕투닥 그렇게 살아가는 데 더 힘을 쓰고 싶을 뿐이다. 크고 화려한 궁과 웅장한 문과 담의 주인이었던 사람들 말고, 자신들의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들을 만들기 위해 힘썼던, 이제는 역사 속에 감추어진 성곽 밖 사람들 이야기가 궁금한 것이다.

 

 

마지막날엔 바람도 많이 불고 갑자기 더 추워졌다. 전날 이음이가 아프기도 해서 중간에 그만하고 집으로 돌아갈까 징징대는 나를 일으켜주는 옆지기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돌았다. 무언가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은 정말 소중한 행복임을, 오글거리지만 적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