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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타츠루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1. 나의 대충주의

쌩쌩 2014. 6. 17. 10:41

 

오늘 나의 대충주의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좋은 점과 안 좋은 점이라고 하기에는 머하지만 결과적으로 나의 경험을 축소 시킨다고 해야 하는 지점에 머무르게 하는 바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좋은 점은 느슨하고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는다는점,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고 전체적인 그림을 잘 그릴 줄 알며 게으르면서 성실하게 지낼 수 있고 과도하게 나를 몰아 세우지도 않고 잘 내버려 둘줄도 알며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겸허하게 있을 줄 알고 아는 것들로 나를 치장하지 않고 나의 한계를 파악하고 차분히 나를 바라보면서 하나하나 앞으로 밟아 나갈 수 있는 힘이 있게 한다.

그런데 항상 어느 지점에 나를 머무르게 만든다. 그것이 좋지 않다고 하기에는 머하지만 생의 두께를 왜소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모르는 것에 대해서 겸허하게 있을 줄 안다고 하지만 모순적으로 또한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미 나는 알 고 있다란 태도를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어 더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전체적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잘 말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파악하고 있다란 오만한 태도를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이전의 나의 시간들을 보니 악기에 대한 태도, 자격증들에 대한 결과, 구기운동들에 대한 나의 실력, 어떤 조직내에서의 위치, 등등이 항상 어떤 언저리에서 맴돌게 된다. 이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예전에도 여러번 분석이라는 재미로 넘어가볼까 아니면 세밀함에 대한 의지를 키워보자라며 나 자신을 다독여 본적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머 어때 난 잡다한 인간이 될꺼야 하면서 또 나를 두둔한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 계기는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을 읽으면서 인 것 같다.

 나는 과연 많은 것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던가? 충분히 알기 위해 연구를 해 왔던가?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가끔은 저 너머까지 끝까지 가보는 시도를 해 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표준적인 세계에서 나를 위치시키는 것에 익숙해져 그 위치에서 내려다 보는 자세를 가졌지 않았나 싶다. 그러면서 대화를 하기 보다는 연구를 하기 보다는 대응한다. 이제는 이런 것들과 결별하고 모르는 것들과 알 수 없는 것들에 더 정면으로 마주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