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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예술론, 철학과 폭력(수업 내용 정리)

쌩쌩 2014. 10. 31. 19:55

 

 

 

칸트와 관념의 폭력


 칸트는 감성과 지성은 전혀 섞일 수 없으며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두 뿌리라는 기본 입장에서 출발한다. 즉, 이전의 철학은 그 한계와 구분을 명확히 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올바른 인식이 이루어 질 수 없었으며 이성의 월권행위에 의한 결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한 고찰을 떠나 두 뿌리에 의한 인식의 가능 조건만을 학으로 삼을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 순수 인식들을 다루지 인식되는 사물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선 인식의 가능 조건을 살피는데 있어서 감성의 한 뿌리에 대한 분석을 시작한다. 그는 대상이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 촉발함으로써 표상들을 얻는 능력을 감성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대상이 표상능력에 미치는 결과가 감각이며 감각에 의해 대상과 관계 맺는 그런 직관을 경험적이라고 일컫는다. 하지만 여기서 모든 현상들의 질료가 후험적으로만 주어진다 하더라도 그것들의 형식이 그것들을 위해 선험적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감성의 순수한 형식은 시간과 공간으로 선험적으로 마음에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칸트는 시공간을 초월적 감성의 선험적 형식으로 여겨 이러한 형식의 틀에서 존재를 주관으로 환원시켜 버렸다.


 이는 헤르더에 의해 이미 비판된 논의로써 칸트는 언어로 된 관념인 여러 정신 능력을 가지고 사유와 인식을 다루었다. 다시 말하면 언어의 문제를 집고 넘어가지 않고서는 결정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니체는 “만일 우리가 언어의 구속 내에서 사유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유하기를 멈춘다.”라고 말하며 소쉬르는 “미리 정해진 관념들이란 있을 수 없으며 언어의 출현 이전에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예전 서양 철학에서는 생각한다는 것이 신비화 되었지만 현대 철학에서는 언어에 놀아난다고 여긴다. 즉, 모든 의식적 사유는 물질적 조건에 구속되어 있으며 전적으로 언어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 논의를 더 이끌고 들어가면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사회적 존재가 되며 관념을 통해 동일하지 않는 것들을 동일하게 만드는 관념의 폭력, 언어의 폭력이 개입되는 것이다.




하이데거와 존재


이러한 폭력의 문제 속에서 하이데거는 단지 인식하고 사고하는 인간의 틀 안으로 갇혀 버린 존재에 다시 권리를 돌려주려 하였다. 즉, 하이데거의 문제는 표상, 관념, 언어의 외부에 있는 존재의 외부성(포착되지 않는 존재≠물자체)을 찾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플라톤 이후의 모든 철학자들은 존재를 해석하기 위해 이론적인 태도를 취하는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초기에 ‘존재’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단어의 의미는 이중적이었다. 일차적인 의미는 ‘있음’이었지만, 때로는 명사로서 ‘실체’나 ‘최고의 존재자’를 가리키기도 했다. 하지만 플라톤과 이후의 철학자들은 두 번째 의미로 해석하여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에서 벗어나 존재의 의미를 궁극적인 원리에서 찾는 경향성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즉, ‘존재의 망각’을 통해 서양 철학사에 폭력이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신은 존재할까? 자유는 존재할까? 라고 묻기 보다는 모든 질문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인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우선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하려면 두 단어, 존재와 존재자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존재자’는 존재를 가지고 있는 어떤 것, 즉 인간, 동물, 의자 등을 가리킨다. 그리고 ‘존재’라는 단어는 ‘있음’ 혹은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원초적인 조건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다. 바로 이 ‘존재’가 모든 존재자들 속에 공통으로 깃들여 있다. 그리고 ‘존재’와 ‘존재자’라는 두 개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존재 없이 존재자가 있을 수도, 존재자 없이 존재가 있을 수 없다. 존재는 모든 사물에 깃들여 있지만, 인간인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의 존재 방식을 탐구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하이데거는 결론을 내렸다. 모든 존재들 가운데 유일하게 “존재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은 우리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이렇게 묻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유일무이하게 존재에 대한 모종의 선 이해를 가지고 있음을 함축한다고 여겼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의 존재 방식에 대한 분석과 존재의 의미에 대한 탐구를 통해 시공간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에 앞서 무차별적으로 주어진다. 예를 들어 “비가 온다”고 하면 익명적으로 비가 우리에게 오는 것이며 우리는 아무런 주도권이 없으며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즉, 공간은 외부적으로 주어져 있는 사건이며 어쩔 수 없음은 또한 현존재가 공간에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발적 존재가 아니라 공간과 함께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메를로 퐁티는 “나의 있음은 생각과 언어를 통해서 알 수 있는게 아니라 단지 공간과 함께 직접적으로 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직접적으로 나 자신이 여기에 있음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하이데거는 동사적 사건인 존재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존재자가 나타나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장소로서 존재는 주객 이전의 관계로써 표상해서 이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즉,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술가들은 사물이 나를 본다고 말한다.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은유적으로 존재를 빛이며 울림이고 공명이라 표현하였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이미 앞에서 살펴본 인간 언어의 고유한 한계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우리는 “존재는 존재다.”라고 동어 반복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술 작품의 근원과 존재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이라는 논문은 의도적으로 존재의 본질에 대한 물음의 길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말한다. 즉, 예술이 무엇인지는 존재에 대한 물음에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 질문에 대한 답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어떤 대답도 하고 있지 않은 물음이며 대답인 양 보이는 물음에 대한 지침이라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예술가는 예술 작품의 근원이고 작품은 예술가의 근원이다”라고 말하며 탐구를 시작한다. 그리고 예술가와 예술 작품은 상호관련에 있어 예술에 의해 존재한다고 밝히며 끊임없는 질문을 시작한다. 원환의 도정 속에서 현실적인 작품을 통해 작품이 어떻게 존재 하는지 묻는다. 존재자의 존재를 탐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단순히 예술작품들을 비교 고찰하면서 예술이 무엇인가를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의 존재를 생각하려 하는 것이다. 즉, 무엇이 예술작품에 존재를 주었는지, 그리고 그 무엇이 작품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는지 이해하려 애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작품의 ‘있음’에 완전히 몰두하면서 존재를 경험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작품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아 떠나는 하이데거는 먼저 작품이 사물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건축 작품 속에 석조가 있다.”, “목각작품 속에는 목조가 있다.”, “언어작품 속에는 발설적인 것이 있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직접적이고 온전한 현실성을 적중시키기를 원하며 작품의 사물적 차원을 시야에 데려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에야 작품이 하나의 사물인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것이 덧붙여지는 그런 사물인지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물이란 진실로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또한 하이데거에 있어 사물의 사물존재에 대해 배우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고대로부터 존재자에 대한 전승된 해석들 속에서 미리 사물들의 사물성에 대한 경계구분을 접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오늘날에 와서 사물의 사물성에 대한 해석들을 세 가지로 총괄한다.


 첫째, 사물이란 그 둘레에 속성들이 모여 있는 그런 것이다. “그것은 곧, ‘그때그때마다 눈앞에 놓여 있는 것에 또한 항상 이미 붙어서 거기에 함께 나타나는 바 그것’ 이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이러한 것이 현전성이라는 의미에서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근본경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들이 그 이후 표준적인 해석이 되며 번역을 통해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해석이 확정지어지게 된다. 즉, 이러한 해석은 단지 언어적 오랜 습성에 의해서 길들여진 것일 뿐이며 사물의 사물적 차원에 폭력을 가해 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유만이 결정권을 지는 듯 하게 허용되어 사물을 파악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물을 덮치는 것이다.


 둘째, 사물이란 감관 속으로 주어진 것의 한 다양성의 통일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는 앞서 행해진 해석과 마찬가지로 의심해 보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즉, 사물의 사물적 차원을 온전히 고려해 본다면 우리가 듣는 것은 문이 덜커덩거리는 소리이지 결코 음향적인 감각들이나 또는 그저 순전한 소음도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해석은 사물을 우리와 직접적으로 과도하게 밀착시키는 것이다. 결국 사물은 사라져 버린다.


 셋째, 사물이란 일종의 형상 지어진 질료이다. 하지만 존재자에 대한 규정들로서 질료와 형상은 도구의 본질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분석해 보면 형상 안에 놓여 있는 질료는 거꾸로 형상이 질료의 배치를 규정한다. 이렇게 얽힌 형상과 질료는 용도에서부터 조정되어진 것이다. 그리고 용도로부터 이러한 존재자가 우리에게 일견되고 그러한 용도에 형상부여가 근거하고 또한 형상부여를 통해 정해진 질료선택이 이루어진다. 즉, 용도에 질료와 형상의 결합 틀의 지배가 근거한다. 따라서 질료와 형상의 개념 틀은 특별히 사용과 쓰임을 위해 제작된 것을 지칭한다. 즉, 질료와 형상은 순전한 사물의 사물성에 대한 근원적인 규정이 아니다.(예술작품의 근원 559p~567정리)




도구, 예술작품 그리고 순전한 사물


 도구는 제작 완료된 것으로서 마치 순전한 사물처럼 자기 안에 머물지만 순전한 사물인 화강암처럼 자생적인 것을 지니진 않는다. 다른 한편, 도구는 인간의 손에 의해 제작된 예술작품과 근친성을 보이지만 예술작품은 오히려 자생적인 순전한 사물과 비슷하다. 그렇지만 예술작품을 순전한 사물에 넣지 않는다. 즉, 도구는 사물성에 의해 절반은 사물이긴 하나 그 이상이며 이와 동시에 절반은 예술작품이면서도 그 이하이다.(567p~568p) 여기서 하이데거는 도구 존재의 도움을 빌려 결국에는 모든 존재자까지도 개념 파악하는 일이 암시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앞의 두 해석과 마찬가지로 사물의 사물존재에 대한 덮침에 불과하다. 즉, “오랫동안 익숙해져 버린 이러한 사유 방식은 존재자에 대한 모든 직접적인 경험을 앞서 붙잡는다.” 또한 하이데거는 저 사물 해석들로부터 자라 나온 사유 방식은 서로 서로 긴밀하게 결합하여 사물의 사물적 차원에 이르는 길 뿐만 아니라 도구의 도구적 차원에 이르는 길 그리고 올바르게 작품의 작품적 차원에 이르는 길마저 우리에게서 차단해 버린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앎을 통해 ‘앞서 붙잡음’과 ‘덮쳐잡음’을 멀리하여 그 존재자에로 향하며 그 존재자 자체에서 그것의 존재에 대해 사유하여 나간다. 사유의 이와 같은 노력은 곧 우리가 사물의 사물적 차원에 이르는 길을 억지로 강행 하지 않으며 끈질기게 사유로부터 벗어나는 사물을 사물 존재 그 자체로 내버려두는 일이다.




도구_존재에 있어 친숙한 존재자와 예술 작품


 하이데거는 이러한 앎을 지니면서 그리고 통상적인 해석들에 대한 덮쳐잡음의 시도에 거리를 두면서 도구의 도구적 차원을 찾아보기 위해 도구의 도구 존재 의미를 단순히 서술해 나가려고 시도한다. 왜냐하면 도구는 우리의 특별한 방식으로 즉, 우리 고유의 제작행위에 의해 존재에 이르므로 그 존재에 있어 친숙한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도구의 도구적 차원을 찾아나가려는 시도는 사물의 사물적 차원과 작품의 작품적 차원에 대한 어떤 것이 우리에게 피어오를지 모를 가능성의 문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로 반 고흐가 신발도구를 그린 회화 한 점을 선택한다. 농촌 아낙네의 신발은 농촌 아낙네가 신발을 신고 있는 그 상태에 신발은 비로서 그것으로 존재한다. 신발은 현실적으로 쓰임으로 우리는 도구적 차원과 현실적으로 만난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반 고흐의 회화 속 신발도구는 그 주위에 불특정한 공간만이 있다. 그런데도 하이데거는 “그 작품 속에서 도구 자체가 그것의 ‘자기 안에 머무름’으로 일어선다.”고 말한다. 또한 하이데거는 농촌 아낙네의 현실적인 신발 도구의 벗어놓음, 무심히 지나침, 단순히 바라봄 속에서 용도 안에 존속하는 도구 존재의 충일함을 통해 그녀는 대지의 침묵하는 부름에 내맡기고 도구의 신뢰성에 힘입어 그녀의 세계를 확신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이데거는 단순히 신발도구를 설명하거나 신발도구가 현실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도구의 도구 존재가 발견된 것이 아니라 신발도구를 반 고흐의 회화 앞으로 데려와짐으로 도구의 도구 존재가 발견되었다고 말한다. 즉, 오히려 작품에 의해 비로소 도구의 도구존재가 제대로 나타난다는 것이고 반 고흐의 회화가 한 켤레의 농부의 신발이 무엇으로 존재하는 바 그것을 열어 보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의 본질은 예술 작품 속에서 존재자의 진리가 스스로 작품 속으로 정립됨을 일컫는다.


 하지만 도구의 본질에서부터 따온 지배적인 사물개념은 예술작품의 현실성을 찾는데 만족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저 지배적인 사물개념은 사물적 차원의 본질을 빗겨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존재자의 존재를 사유할 때 작품의 작품적 차원이 도구의 도구적 차원이, 사물의 사물적 차원이 더욱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예술 작품과 진리


 앞에서 작품의 사물성격을 통상적인 사물개념으로 사물적 차원을 파악하려던 시도는 실패했다. 이러한 사물개념은 덮치고 앞서 잡음 속으로 밀어 넣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익숙한 개념들이 치워지고 허물어 지면서 작품에서의 사물적 차원으로 인도되어진다. 결국 답인 양 보이는 물음의 대한 지침들로 작품 그 자신이 그 자체로 열어 보여 진다.


 하나의 작품은 어디에 속하는가? 하이데거는 “작품은 작품 그 자체를 통해서 열려 보여지는 그러한 영역에만 유일하게 작품으로 속한다.”고 말한다. 즉, 작품이 본래의 공간에서 벗어나 그렇게 박물관 안으로 옯겨 놓인 작품들은 그것들의 세계로부터 빼앗아 간 셈이다.


 우리는 점점 작품 속에서 진리의 발생사건이 작용한다는 하이데거의 해석으로 들어간다. 전통적인 진리에 대한 정의는 특수한 기준을 통해 진리는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진리는 정적인 사실들이 아니라 매 순간 일어나고 살아 있는 과정이다. 즉, 그는 진리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분석을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진리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탐구한다.


 하이데거는 건축 작품으로 시선을 향하여 진리가 작품 속에서 드러나도록 보여준다. 존재자의 존재를 끊임없이 사유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무엇인 바 그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하이데거는 공간의 두 가지 형태를 이야기 한다. 인간이 그 위에다 자신의 거주의 기초로 삼는 그것인 대지를 밝힌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대지란 피어오르는 것 속에서 감싸는 것으로 공간의 현성이다. 즉, 닫혀 지는 것으로서 솟아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대지가 솟아오르면서 한 세계를 열어 보인다. 세계는 현존재의 존재 가능성을 보장해 주는 같은 그러한 공간으로서 결코 직관될 수 있는 그런 하나의 대상이 아니다.


 작품존재는 이러한 하나의 세계를 건립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하나의 작품이 존재함으로써 공간을 마련하고 즉, 열린 장의 트임을 자유로이 내어주고 이 트임을 그 윤관들에 맞추어 넣는 다는 것이다. 또한 작품은 이쪽으로 세우면서 존재한다. 도구는 용도와 사용 가능성에 규정되기 때문에 도구는 용도성 안에서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작품은 한 세계를 건립함으로써 질료를 사라져버리게 하지 않고, 오히려 가장 잘 솟아나오게 한다. 작품은 하나의 세계를 건립함으로써, 작품은 대지를 이쪽으로 세운다. 작품은 대지 자체를 한 세계의 열린 장 안으로 밀어내고 견지한다. 작품은 대지를 하나의 대지로 존재하게 해준다.(588p)


 “대지 자체가 그것의 ‘자기를 닫아버림’의 해방된 쇄도에서 대지로서 나타나야 한다면, 대지는 세계의 열린 장 없이 지낼 수 없다. 모든 본질적인 역운이 전개되는 광대함과 궤도로서 세계가 결정된 것 위에 근거를 삼아야 한다면, 세계도 대지로부터 훨훨 떠나 갈수 없다.”(592p)




진리와 예술


 하이데거에 따르면 진리란 참된 것의 본질이다. 이는 다시 하이데거의 입장으로 돌아간다. 하이데거의 문제는 존재의 외부성을 찾아 존재의 권리를 되돌려 주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진리란 그것의 대상 사이의 일치로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들춰진, 드러난, 혹은 밝혀진 어떤 것으로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진리는 어떤 것이 드러날 때 일어난다. 그 드러남이 진리의 본질이며 우리는 존재자들이 존재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진리란 존재자의 비은폐성으로 본다. 이는 다른 모든 진리 이론이 작동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를 전제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항상 비은폐성 안에서 전체로서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자신 안에 은폐되어 있는 것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중이며, 이 과정은 영원히 종결되지 않는다.


 사물들이 그리고 인간들이 존재한다. 존재 하는 것은 존재 안에 서 있다. 존재자가 존재를 통해 들어온다. 표상화 되기 이전에 ‘있음’이 있다. 존재자는 보이지만 존재는 동사적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존재자의 비은폐성은 그저 눈앞에 있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발생사건이다. 따라서 “비은폐성으로서의 진리의 본질에는 이러한 거절이 이중적인 은닉의 방식으로 속하고 있다. 즉, 진리는 그 본질상 비-진리이다”


 이러한 진리는 진리 자체로 현성하는 과정 속에서 밝힘과 은닉 사이에 근원적 투쟁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안으로 존재자가 들어서고 존재자는 열린 한 가운데서 쟁취된다. 이러한 열린 장에는 또한 세계와 대지가 속한다. 그리고 세계와 대지는 저 밝힘과 은닉의 투쟁 속으로 들어선다.


 진리가 발생하는 이 같은 방식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작품의 작품 존재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한 세계를 건립하고 대지를 이쪽으로 세우면서 작품은 그 속에서 전체로서의 존재자의 비은폐성, 즉 진리가 쟁취되는 저 투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599p) “작품에로 맞추어 잇대어진 빛남이 곧 미이다. 아름다움이란 비은폐성으로서의 진리가 현성하는 하나의 방식이다.”(600p) 즉, 하이데거에 따르면 예술이란 곧 진리의 한 생성이요 발생이다.






참고 문헌


30 분에 읽는 하이데거, 마이클 와츠 지음, 전대호 옮김, 2006년 3월, 랜덤하우스중앙

칸트와 관념의 폭력


 칸트는 감성과 지성은 전혀 섞일 수 없으며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두 뿌리라는 기본 입장에서 출발한다. 즉, 이전의 철학은 그 한계와 구분을 명확히 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올바른 인식이 이루어 질 수 없었으며 이성의 월권행위에 의한 결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한 고찰을 떠나 두 뿌리에 의한 인식의 가능 조건만을 학으로 삼을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 순수 인식들을 다루지 인식되는 사물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선 인식의 가능 조건을 살피는데 있어 감성의 한 뿌리에 대한 분석을 시작한다. 그는 대상이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 촉발함으로써 표상들을 얻는 능력을 감성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대상이 표상 능력에 미치는 결과가 감각이며 감각에 의해 대상과 관계 맺는 그런 직관을 경험적이라고 일컫는다. 하지만 여기서 모든 현상들의 질료가 후험적으로만 주어진다 하더라도 그것들의 형식이 그것들을 위해 선험적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감성의 순수한 형식은 시간과 공간으로 선험적으로 마음에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사고하기 전 감성의 수용성으로 시작한 우리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표상이 주관의 형식으로 이미 그 기초에 놓여 있어야 외적 경험이라는 것이 비로서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현상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징표를 매개로 유한한 존재로서 형이상학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즉,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적 감성의 선험적 형식으로 여겨 이러한 형식의 틀에서 존재를 주관으로 환원시켜 버렸다.


 이는 헤르더에 의해 이미 비판된 논의로써 칸트는 언어로 된 관념인 여러 정신 능력을 가지고 사유와 인식을 다루었다. 다시 말하면 언어의 문제를 집고 넘어가지 않고서는 결정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니체는 “만일 우리가 언어의 구속 내에서 사유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유하기를 멈춘다”라고 말하며 소쉬르는 “미리 정해진 관념들이란 있을 수 없으며 언어의 출현 이전에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즉, 모든 의식적 사유는 물질적 조건에 구속되어 있으며 전적으로 언어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 논의를 더 이끌고 들어가면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사회적 존재가 되며 관념을 통해 동일하지 않는 것들을 동일하게 만드는 관념의 폭력, 언어의 폭력이 개입되는 것이다.




현대철학과 존재


 이러한 폭력의 문제 속에서 하이데거는 단지 인식하고 사고하는 인간의 틀 안으로 갇혀 버린 존재에 다시 권리를 돌려주려 하였다. 즉, 하이데거의 문제는 표상, 관념, 언어의 외부에 있는 존재의 외부성(포착되지 않는 존재≠물자체)을 찾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플라톤 이후의 모든 철학자들은 존재를 해석하기 위해 이론적인 태도를 취하는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초기에 ‘존재’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단어의 의미는 이중적이었다. 일차적인 의미는 ‘있음’이었지만, 때로는 명사로서 ‘실체’나 ‘최고의 존재자’를 가리키기도 했다. 하지만 플라톤과 이후의 철학자들은 두 번째 의미로 해석하여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에서 벗어나 존재의 의미를 궁극적인 원리에서 찾는 경향성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즉, ‘존재의 망각’을 통해 서양 철학사에 폭력이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신은 존재할까? 자유는 존재할까? 라고 묻기 보다는 모든 질문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인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우선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하려면 두 단어, 존재와 존재자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존재자’는 존재를 가지고 있는 어떤 것, 즉 인간, 동물, 의자 등을 가리킨다. 그리고 ‘존재’라는 단어는 ‘있음’ 혹은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원초적인 조건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다. 바로 이 ‘존재’가 모든 존재자들 속에 공통으로 깃들여 있다. 그리고 ‘존재’와 ‘존재자’라는 두 개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존재 없이 존재자가 있을 수도, 존재자 없이 존재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존재는 모든 사물에 깃들여 있지만, 인간인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의 존재 방식을 탐구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하이데거는 결론을 내렸다. 모든 존재들 가운데 유일하게 “존재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은 우리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이렇게 묻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유일무이하게 존재에 대한 모종의 선 이해를 가지고 있음을 함축한다고 여겼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의 존재 방식에 대한 분석과 존재의 의미에 대한 탐구를 통해 시공간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에 앞서 무차별적으로 주어진다. 예를 들어 “비가 온다”고 하면 익명적으로 비가 우리에게 오는 것이며 우리는 아무런 주도권이 없으며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즉, 공간은 외부적으로 주어져 있는 사건이며 어쩔 수 없음은 또한 현존재(인간)가 공간에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발적 존재가 아니라 공간과 함께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메를로 퐁티는 “나의 있음은 생각과 언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공간과 함께 직접적으로 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직접적으로 나 자신이 여기에 있음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많은 철학자들에 의해 존재는 레비나스의 ‘liliya’ ‘원소’, 블랑쇼의 ‘바깥’, ‘밤’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우리는 깨어있을 수밖에 없다. 구체적인 현장에서 존재가 나에게 스며 들어온다. 메를로 퐁티는 <얽힘-교차>에서 언어(반성) 이전에 시각을 통해 본다는 것이 어떻게 똑같이 나 자신을 보는 수동적인 사건인지를 확실히 말한다. 보이는 사물들이 보는 자 안에 흔적을 남긴다. 동사적 사건, 그리고 울림이고 공명인 존재는 니체의 신경자극, 있음의 감각에까지 소급해 들어갈 수 있다. 존재자가 나타나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장소로서 존재는 주객 이전의 관계로써 통제가 되지 않는다. 즉,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술가들은 사물이 나를 본다고 말한다.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림 안에 들어감으로써 감각을 느낀다.


들뢰즈의 <차이 자체>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동사적 사건인 존재는 우리에게 어쩔 수 없이 열려 있게 하는 그 무엇이다. 공간은 우리에게 공포를 일으킨다. 존재는 우리의 주도권을 빼앗으며 부정의 부정을 일으킨다. 동사 ‘존재한다’와 술어적 활동은 모든 다른 동사와 모든 보통 명사 속에 함축 되어 있다. 존재자가 무엇이든지 어떤 식이로든 이미 존재에 의해 매개되어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어떤 경우든 근본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동사 ‘존재한다’의 술어적 기능은 최초의 폭력이다. 여기서 들뢰즈는 그 존재 동사를 극복해야 할 표적으로 삼는다. 들뢰즈의 경험론은 모든 동사들과 명사들을 존재 동사로부터 해방 시키고자 한다.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을 ‘초월적 경험론’이라고 부른다. “사유되는 것으로 인도하는 길 위에서 모든 것은 감성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들뢰즈는 말하며 이것을 ‘감성의 특권’이라 부른다. 들뢰즈가 자기 철학을 초월적 경험론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경험론인 까닭은 이처럼 감성에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어떤 방식으로도 동일성에 종속되지 않는 <차이 자체>라고 부르는 것의 가능성을 통해 존재에 매개 되지 않는 경험론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개별자들 사이에 성립하는 <경험적 차이>는 이미 개체로서 우리 경험 가운데 나타난 개별자들 사이에 성립하는 외적 관계라는 뜻에서 외적 차이인 반면, <차이 자체>는 하나의 개별자가 그 개별자로서 발생할 수 있게 해주는 근거가 되는 차이라는 뜻에서 내적 차이라고 부른다. 들뢰즈에 따르면 내적 차이이고 초월적 탐구의 대상인 <차이 자체>가 감성적인 것 속에서 찾아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성에서의 내적 차이에 관한 이론을 칸트의 <대칭적 대상들의 역설>에서 발견한다. “나의 손이나 귀와 모든 점에서 동일한 것은, 거울에 비친 그것의 영상만 한 것이 있을 것인가? 그러나 나는 거울에 비친 손을 그것의 원본의 위치에 갖다 둘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원본이 오른손이라면 거울 속의 손은 왼손이고, 오른쪽 귀의 영상은 왼쪽 귀여서 결코 서로 대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지성이 사유할 수 있을 내적 차이라곤 전혀 없다. 그런데도 감각이 가르쳐주는 한에서 그 차이는 내적인 것이다” 즉, 이러한 대칭적 대상들의 실재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지성 개념이 아니다. 오로지 감성에 내재하는 <비개념적 차이>만이 이러한 실재상의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의 <강도적 크기>


 칸트의 강도적 크기는 직관을 정도의 관점에서 채우는 것을 말한다. 강도적 크기도 포착을 통해 도달하지만, 외연적 크기와 달리 그 포착은 계속적인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만’ 이루어진다. “이 포착은 한 순간에 감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서로 다른 감각들의 계속적인 종합을 거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30도라는 온도는 10도짜리 온도 셋의 종합으로 이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칸트의 강도 이론이 중요한 이유는 <비개념적 차이>가 경험 가운데 실재가 발생하기 위한 충족 이유라는 들뢰즈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고픔을 예로 든다면 설탕의 결핍, 버터의 결핍 등이 서로 외재적일 경우 종합을 통해 배고픔이라는 강도적 크기에 도달하지 못한다. 외재적 종합이 아니라 서로 내적으로 관여하는 상호적 종합만이 하나의 강도적 크기를 가능케 한다. 그리고 이 상호 종합의 결과로 강도적 크기가 의식 가운데 포착되는 실재이다. 이렇듯 강도 이론에서 감각들 사이에 성립하는 <비개념적 차이>가 의식 상관적인 실재가 발생하기 위한 충족 이유가 된다.


 그리고 의식 상관적인 실재 대상의 선험적 근거는 변별적인 것들이다. 변별적인 요소들의 종합이 의식적 지각의 대상을 발생하도록 한다. 하지만 경험 자체는 우리에게 혼합체만을 제공한다. 따라서 이 혼합체를 발생적으로 구성하는 변별적인 것들은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 변별적 요소들 자체는 의식되지 않는 지각일 뿐이며 그렇기에 변별적인 무의식적인 것이라 불려야 마땅하다. 정리해 보면 들뢰즈의 ‘초월적 경험론’은 잠재적인 것들의 상호 종합만이 선험적 근거이다. 그리고 경험의 선험적 근거는 주관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다.
 
 경험의 근거는 선험적 개념에 있지 않고 순수 지각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파랑과 노랑은 그 자체로는 의식적 경험의 대상이지만, 초록의 발생 요소로 고려되었을 때는 결코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경험은 초록 외에는 알지 못하며, 파랑과 노랑은 발생의 근거로서 초록 뒤에 잠재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감각되는 것은 초록이 아니라 오로지 파랑과 노랑만이다.


초월적 경험론의 공명


 인식이 구성되려면 개념은 필수적이다. 들뢰즈는 프루스트를  따라서 <우리의 지성에 의해 씌어진 문자>와 <사물의 형상이라는 문자>를 대립시킨다. 전자는 지성 개념에 의해 매개된 표상을 가리키며, 후자는 기호, 형상 등으로 바꾸어 써도 좋은, 우리 감성에 나타난 강도적 크기를 가리킨다. 이 감성 안의 미지의 형상으로부터 개념의 출현을 발생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만 들뢰즈 철학은 경험론일 수 있을 것이다.


 기호의 형태를 유형화하고 각 유형에 해당하는 사유모델을 확립하는 일을 들뢰즈는 바로 프루스트론을 통해서 수행하고 있다. 예컨대 감각적 기호가 감성을 자극했을 때, 이에 응하는 능력은 <비자발적 기억력>이며 이 능력의 기능은 공명을 발견해 내는데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 공명을 가능케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니라 <차이 자체>이다. 프루스트의 문맥에서 말하면 그 <차이 자체>란 바로 비자발적 기억이 발견해 낸 <순수과거>이다.


 확실히 프루스트의 비자발적인 기억은 플라톤의 상기를 닮았다. 또 비자발적인 기억을 통해 발견되는 차이자체는 상기를 통해 발견되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닮았다. 그리고 이 차이 자체의 이념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마찬가지로 경험적 차원에서 차이, 유사성, 동일성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 사이엔 메울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 “이제 사정이 플라톤과는 전혀 딴판이다. 본질은 더 이상 세계를 하나의 전체로 결합하고 또 그 전체가 중용을 갖추도록 해주는 고정된 본질, 볼 수 있게 된 이상이 아니다.” “감각적 기호는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것은 기억력을 동원하고 영혼을 움직이게 한다. 그러고는 마치 <차이 자체>의 이념이 사유되어야 하는 유일한 것인 듯이 사유에게 본질에 대해 사유하도록 강요한다.” 즉, 들뢰즈에게서 <차이 자체>는 경험이 주어지는 상위의 관점으로서 개별자의 사유가 위치하게 되는 곳이다.


유목민임을 자처하는 들뢰즈


 들뢰즈의 초월적 경험론은 존재 개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숙명 때문에 멸망하기보다는 존재 동사를 극복해야할 표적으로 삼는데서 경험론으로 존립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경험론의 핵심정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 철학사는 존재의 문제 때문에 방해 받는다. 사람들은 속성의 판별과 현존의 판별을 논의한다. 그것은 항상 ‘존재’ 동사와 원리에 관한 물음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꿰뚫고 변조시키며, 존재를 손상시키고 무너뜨리는 관계들과 만나야 한다. ‘있다’를 ‘과’로 대체해야 한다. ‘과’는 심지어 특정한 관계나 접속사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관계들의 기초를 이루는 것, 모든 관계들을 열어주는 길이다. ‘과’는 특별한 존재이고 사이의 존재이다.


 ‘있다’를 위해 사유하는 대신에 ‘과’와 더불어 사유하는 것, 경험론에는 이것 말고 다른 비밀은 없다.” 들뢰즈는 이런 경험론적 관점에서 주체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 적이 있다. “문헌학 교수인 니체의 자아(존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즉, 갑자기 이성을 잃고 이상한 인물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일련의 상태를 통과하는 주체가 있을 따름이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개념들은 그것들이 탄생했고 사용되었던 그리스적 토양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것이 들뢰즈 경험론의 핵심 주장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스인들의 개념이란 사실 존재하지도 않는 환상이며, 그 환상으로 끊임없이 귀환하려는 시도는 철학의 보편적 운명이 아니라, 몇몇 철학자들의 사적인 작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영국인들은 부스러지고 조각나고 전 세계로 확대된 옛 그리스의 땅 위에서 유목민 생활을 한다. 그들이 프랑스인이나 독일인처럼 개념을 소유하고 있다고 조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개념을 획득하며, 획득된 것만을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