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프로젝트의 벽

우리들의 세번째 이사 <뿌리깊은 나무>: 실패한 귀촌담 (2014년 6월-2015년3월)

 잔잔 2016. 1. 4. 01:08

 

 

 

2011년 12월, 우리는 빈마을 공산당(공부하며산당)에서 해방촌오거리중 한 거리 안쪽에 있는 주택 2층, 이음집으로 이사했다. 이음이가 태어나고 6개월 후 2012년 12월, 쌩쌩이 일하는 터전이 가까운 상일동에 있는 상가건물 4층 방3개짜리 집으로 이사를 했고 그 중 방 하나는 터전에서 들숨방으로 아이들과 함께 사용하였다. 그러다 여울이가 태어나고 우리는 또 한 번의 이사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2014년 9월 쌩쌩이 일을 그만두고 2015년 2월까지의 시간동안 우리는 본격적으로 귀촌을 하기 위해 준비를 했었다. 하지만 제목에서 밝혔듯 이것은 실패한 귀촌담이다.


 

'나중에'라고 딱지 붙여놓았던 일들을 실행하는데는 하나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그리고 넷이, 역시나 더 많은 힘을 실어주는가보다. 나와 쌩쌩이 혼자였을때 막연히 가져왔던 귀촌에 관한 생각들이 이음이가 생기고 7년뒤라는 구체적인 계획이 되고, 여울이가 태어나자 더는 나중에라고 미루지 말고 바로 하자는 행동이 되었다.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해서 이야기한다면 또 그렇기도 하지만 사실 이렇게 앞당겨 이사를, 그러니까 귀촌을 결정하게 된데는 더 다양한 사건들과 감정, 생각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었다. 어쨌든 우리는 세번째 이사에 앞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책을 비롯한 여러 자료들을 나름대로 찾아보며 준비를 했다. 그리하여 두번째 프로젝트, 우리들의 세번째 이사 <뿌리깊은 나무>가 시작되었다.

 

 

 


 

무슨일을 하든 제목, 이름붙이기를 좋아하고 의미를 두는 편이다. 해서 제목도 계속 고민했더란다. 그러던중 쌩쌩이 '뿌리깊은 나무'라는 말을 던졌고 나는 맘에 들어 주워 담았다. 뿌리를 내려보자.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가 되어보자. 어째서 이런 생각을 했을까. 정확한 기원을 찾을 수 없으나, 언젠가부터 한 곳에서 오래도록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다. 생각해보면 대학에 가고 나서부터는 계속 서울 여기저기를 떠돌며 산거 같다. 아마 아이들을 낳고 뜨거워진 내게서 유목민의 열기는 수증기가 되어 날아가버리니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뿌리를 내리고 오래도록 살며 가꿀 집, 이웃, 마을을 만들어 가고 싶었다.

첫 번째 귀촌지로 진안을 선택한 것은, 조금 웃기지만, 전주가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문공부를 깊이있게 해보고 싶었고 전주에 있는 고전번역교육원에도 가보고 싶었다. 해서 전주와 가까우면서도 산좋고 물좋은 진안을 선택했다. 연고는 없었다. 우리는 책과 인터넷, 그리고 방송자료들을 토대로 진안에 대한 우리 나름의 그림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4년 6월 우리는 진안이라는 공간에 대한 구체적인 느낌을 갖기 위해 무작정 2박 3일 여행을 떠났다.

 

 

 

차를 빌려 여기 저기 돌아다녔다. 처음엔 귀농인의 집을 중심으로 찾았다. 처음부터 집을 사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귀농인의 집은 많이 없었고 그나마 있는 곳에는 다른 분들이 먼저 살고 계셨다. 미곡마을이라는 곳에 갔을 때 마을의 느낌이 좋았다. 와, 여기서 살면 좋겠다, 는 생각을 했었다. 아이들 몇몇이 밖에 나와 놀고 있었다.

귀촌할 장소를 찾을 때 우리에겐 나름의 장소선정 우선순위 3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이음, 여울 또래 아이들이 있는 곳, 그 다음은 산이 있고 수도에서 나오는 물을 그냥 먹을 수 있는 곳, 그 다음은 쌩쌩이나 내가 각자 하고 싶은 것들을 펼칠 수 있는 곳.

 

 

 

우리는 처음 가보았지만 진안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진안읍에 있는 귀농귀촌협의회에 찾아가 상담을 받고 돌아왔다. 각종 자료들, 소식지와 소개팜플릿들을 챙겨주시며 자주 와보라는 이야길 해주셨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많지 않지만 알뜰하게 쓸 수 있는 실업급여가 있었기에 우리는 쌩쌩의 육아휴직을 즐겼다. 그러면서 다시 본격 이사준비를 시작했다. 먼저 할일은 집을 구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첫번째 과정이 가장 어렵다더니, 역시 그랬다. 마음이 조급해져서 귀농귀촌협의회 사무국장님께 몹쓸 땡깡(!)을 부리기도 했다. 협의회 덕분에 부귀면에 계시는 선생님 한 분을 알게 되었고 메일로 인사를 주고받고 염치불구 도와주시라는 부탁을 드렸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우리 최초의 자동차, 파랭이를 중고로 구입했다! 서울에서 살때는 버스와 지하철이 시시각각 있으니 차가 필요없었지만 내려가려고 준비를 시작하려니 벌써부터 자동차가 절실하다는 것을 느꼈다. 쌩쌩은 중고차사이트를 몇 번 보더니 우리 예산안에서 적당한 경차를 골랐다. 우리는 빈고의 출자금 대부분을 상환신청했다. 그리고 이 파랭이를 구입했다. 개인 간 직거래는 아니었고 중간업체를 통해 구매했다. 이녀석은 우리가 터를 찾는데 있어 우리의 발이자, 소중한 공간이 되어 주었다.

 

 

 

우리는 11월에 부귀면 황금리에 있는 황토방에서 지내면서 우리는 많은 고마운 분들을 만났다. 별 계획없어보이는 젊은 부부의 귀촌을 반가워해주시는 분들도, 걱정해주시는 분들도 있었다. 우리가 메일로 인사드렸던 선생님께서도 고향이 아닌 곳이지만 귀촌하셔 터를 잡고 살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계셨다(위 사진은 직접 손질해 말리고 계신 곶감, 황토방에 놀러오셔서 나누어주셨다). 황금리안에 있던 빈집도 소개시켜주셨고, 또 다른 마을 간사님을 소개해주셔서 웅치골이라는 곳에 있는 빈집을 보러가기도 했다.

 

 

 

황금리에 있던 빈집. 귀촌해서 산다면 살게 될 공간을 떠올렸을 때 그렸던 집과 유사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비워져있었던 집이라 손이 굉장히 많이 필요해보였다. 아이들과 겨울 날 생각을 하면 겁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 일단 보류하고 다른 집을 보러갔다.

 

 

그 다음 보러 갔던 웅치골에 있던 빈집. 가족이 살기엔 너무 컸다. 집 안에 남녀 화장실겸 샤워실이 따로 2개가 있었는데, 아마도 단체손님을 맞기 위한 공간인듯 했다. 그래서 또 다른 집을 보러갔다.

 

 

세번째로 본 웅치골 안쪽에 있던 원룸형태의 빈집이다. 옆에 두채가 더 있던 걸로 기억한다. 여름에 놀러온 사람들을 위한 공간같았다. 마을과 조금 멀리 떨어져있기도 했고 또 집이라는 느낌보다 휴가때 놀러간 펜션같은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결국 이 집도 뒤로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조금은 절망에 빠져있었을 때, 황금리에 계신 선생님께서 마침 우리가 머물고 있는 날과 겹쳐 청년귀농귀촌캠프가 열린다고 소개해주셨다. 우리는 백운면에 있는 캠프장소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귀농귀촌을 계획중이거나 귀촌하여 살고계신 청년, 선생님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며 조급해진 마음을 펴고 있었다. 또 정보도 모으고 관계도 만들어가며 천천히 준비하시는 분들을 보며 우리처럼 다짜고짜 내려와 살려고 하는 사람은 드물고 오랜시간동안 천천히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다양한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우연히 성수면 좌포리에 있는 빈집을 소개받게 되었다. 마을에 있는 교회 목사님이 맡아 관리를 하고 계셨는데 우리는 집을 보고 2월에 이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좌포리에서 만난 빈집. 거실에 화목난로가 있었고 방, 화장실 주방겸거실이 있는 안채와 큰 방하나와 다락방이 있는 별채가 또 따로 있었다. 마당도 있고 마을안에 있는 집이기도 했다. 아이들과 지내기에도, 또 첫 집으로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 집과 우리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나보다.

 

 

 

 

 

 

 

 

얼마 뒤 쌩쌩할머님의 장례식이 있었고, 어머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서울로 돌아온 우리는 귀촌할 장소를 바꾸게 되었다. 진안에 자리를 잡고 어머니를 모시는 일은 우리의 계획이었지, 어머니 삶을 이해하는 방향은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해서 진안에 다시 내려가 죄송하다는 말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목포로 내려왔다. 살지는 않았지만 정붙인 마음에 아쉬움이 컸다. 하지만  서울의 전셋집계약이 두달남짓 남아있었기에서둘러 집을 찾기 시작했다. 우리는 목포와 가까운 무안을 선택했다. 다행히 쌩쌩의 외삼촌댁이 무안에 살고계셨고 우리는 도움을 받아 무안 청계면 월선리에서 빈집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러다 두번째로 만나게 된 집이 아래 사진에 있는 집이다.

 

 

4년 된 빈집이었지만 생각보다 깨끗했다.하지만 전세로 살긴 어렵고 팔기를 원하셨다. 집은 마음에 들었지만 사고 싶지는 않았던 나의 소심한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우리는 이 집을 산다. 그리고 화장실등의 공사와 군데군데 수리를 하려고 문의를 했다. 우리 생각보다 고칠 곳이 많았고 비용도 많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러던 중에 수리해서 살다보면 계속 다른 문제가 생길 것 같다며 차라리 새로 짓는것이 낫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또 집을 새로 짓기로 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 역시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어느정도 예상했지만 끝없이 필요한 돈이 추가되었고 결정적으로 그렇게 지을 집도 우리가 정말 살고 싶은 집인가 하는 의문이 있었다. 또 우리는 이즈음하여 계속해서 싸웠다.

 

그렇게 잦은 싸움과 대충의 화해가 있기를 반복하다 결국 모든 걸 멈추고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집을 새로 지었을 때 필요한 예산을 위해 빚을 내야했고 그 빚을 갚으려면 우리가 필요한 최소한의 돈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한 일을 해야했다. 우리는 그런 삶을 살면서 행복할 자신이 없었다. 단순히 시골에 집을 짓고 사는 것을 귀촌이라고 생각했던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리는 모든 걸 그대로 둔 채 어머니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2월이 지나가고 3월이 되었다. 우선 쌩쌩은 취직을 위해 이리저리 알아보았고 동시에 남은 돈으로 구할 집을 찾았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부모협동조합어린이집을 홍보하는 현수막을 보게 되었고 우리는 이음이가 다닐 어린이집 근처에 집을 구했다. 용산에서 살던 이음집과 비슷한 2층 전셋집이다.

 

 

 

이음이 어린이집도 가깝고 집 바로앞에는 공공도서관이 있다. 한달남짓 발품팔아 겨우 구한 전셋집이었다. 이로써 우여곡절 끝에 우리의 세번째 이사가 마무리 되었다. 4월부터 쌩쌩은 정의당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했고 이음이는 새꿈담는 우리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주인을 기다리며 빈집은 홀로 사계절을 보내고 있다. 현재 우리의 계획은 앞으로 4년후쯤 월선리로 다시 이사를 하는 것이다. 차근차근 준비하고 공부하고 관계를 만들면서 말이다. 비록 처음 도전한 귀촌엔 실패했지만 이음이와 여울이는 여전히 엄마아빠와 함께 또 쑥쑥 커가고 있다.

 

 

 

 

 

 

※이 글은 2014년 12월 19일 18시 31분에 쓰기 시작하여 2015년 12월 14일 23시 15분에 마쳤다. 진안에서 집을 구하고 돌아와 쓰기 시작하였으나 중간에 생각이 바뀌고 장소가 바뀌고 또 바뀌면서 중단되었다. 2015년 4월에 이사를 마친 후 쓰려고 하였으나 마음이 심란하여 글쓰기가 잘 되지 않았다. 어찌됐건 내가 살게 된 이 곳을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낯선곳에 마음을 풀어놓는데 그만큼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 과정과 과정중의 마음을 남겨놓고자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