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 방/스케치북 9

여섯가지 모드

1 실컷 그림을 그리며 놀던 여울이가 아빠랑 목욕하고 있을 때 더 놀고 싶은 이음이가 자기 목욕차례를 기다리며 다 쓴 스케치북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나도 같이 뒤적이다가 이 여섯개의 얼굴이 그려진 쪽을 찾았다. 이음이 설명에 의하면 여울이랑 이음이가 같이 그렸다고 한다. 어떤 걸 자기가 그렸는지 이야기 해줬는데 까먹었다. 2 이음이가 새꿈에서 생일잔치하고 선물로 받아온 크레파스는, 뭐랄까, 색칠하는 맛이 난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건 윤숙이 이모가 선물해준 손에 묻지 않는 크레용이었는데 이번에 받아온 것은 손에 막 묻고 잘 번지고, 진하고 빠르게 칠해지고 똥까지 싼다. 그 크레파스를 들고 둘이 한 번 놀면 손, 발, 다리, 바닥 여기저기 묻고 난리가 나 치우기 힘든 나는 때로 말리기도 하지만,..

암시랑토 안허당께

도서관에서 세달간 인물연필화수업을 들었다. 정육면체, 원기둥, 구, 눈코입없는 흉상, 그리고 눈, 코, 입 그리기를 하고 다섯명의 얼굴을 그렸다. 그리고 여섯번째 얼굴. 계춘할망을 보고나서 할머니 생각이 나 사진첩을 뒤적이니 전에 2G폰카메라로 찍어두었던 할머니의 얼굴 사진이 세장있었다. 얼굴이 넓적하게 그려지고 눈은 커지고 아무튼 비율이 사진과 잘 안맞아 닮지 않게 그려졌다. 그래도 보고싶다, 생각하면서 그린 것 같다. 이전에 다섯명의 얼굴을 그릴때와는 다른 내 마음이 실려서 그런가 나한테는 할머니얼굴 그림에서 다른 게 느껴지는 거 같아 자꾸 들여다 봤다.

그린볼야자

2012년 봄에 해방촌오거리중 빈가게 방향으로 쭉 들어가면 나오는 꽃가게에서 작은 화분 세개를 데리고 왔다. 아담한 아저씨가 주인이었는데, 오른쪽 끝에 있는 그린볼야자를 추천해주셨다. 화분위에 보이는 반 쪼개진 공같은 것이 그린볼이다. 그것안에 들어 있는 양분을 먹고 쑥 자라 야자나무가 된다고 말씀해주셨다. 이 작은 놈이 나무로 클때까지 함께해주기를, 하며 얼마 안있어 분갈이를 해주었다. 꽃향기가 만리까지 퍼져나가 만리향이라 이름 붙여진 아이는 꽃이 금새 떨어졌고 그 뒤로 다시는 꽃을 볼 수 없었다(얼마못가 죽었다. 꽃나무키우기는 늘 실패한다 왤까). 그린볼야자는 좀 더 큰 자리로 옮겨가더니, 그럼 이제 기지개를 켜볼까 하면서 양 어꺠를 쭉 펴기 시작했다. 2013년 12월 겨울 이삿짐 트럭에 실려 칼바..

한장의 그림이 불러온 시

용산 해방촌에 살던 집. 안방에서 문을 열고 있으면 거실 남향창으로 햇볕이 방까지 잔뜩 들어왔다. 뱃속에 있던 이음이와 따뜻한 겨울 햇살을 쬐고 있었다. 5일전 크리스마스날 이사를 마치고, 정리가 끝난 집에서 그때 나는 이 그림을 그리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 집은 잘 있을까. 거실에는 노랑, 작은방엔 파랑색 페인트칠이 되있었는데 우리가 이사가면서 도배를 했었다. 그림 속에 손잡이가 보이는 열려있는 문이 작은 방 문이다. 작은 방 파랑벽에 내가 2012년의 애송시로 적어두었던 김경미의 시 가 떠오른다.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의 입에 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맛없었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꽃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배경그리기

요즘도 잘 가지고 놀고 있는 아기체육관 피아노. 자기들끼리 멜로디를 틀어놓고 춤을 추기도 한다. 이 장난감은 쌩쌩이 전에 일하던 곳에서 아는 분이 주셨다. 커텐과 네모난 앉은뱅이 상과 바구니 수납장도 아직 그대로 있다. 하지만 이사 후 배치는 바꼈다. 그리고픈 사물과 배경도 함께 그렸다. 배경까지 그리니까 그 순간의 시공이 담기는 사진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그릴때는 잘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서 보니 그렇다. 이사오기 전에 살던 상일동 집 안방에 있던 피아노와 그 배경이 떠오르고 해가 잘드는 남향창이 있던 방에 해가 비출 때 모습도 떠오르고 이음이가 붙박이수납장앞에서 수줍게 웃으며 서있던 모습도 떠오른다. 사물만 하나 덜렁 그려졌을 때랑은 분명 다른 느낌을 준다. 신기하다.

책읽는 쌩쌩

5분도 안 되서 완성했다. 움직이는 생명체를 그리려면 재빠르게 해야한다는 걸 지난 번 이음이를 통해 배웠으므로. 더군다나 갑자기 움직이지 말라고 하면 괜히 더 움직이고 싶은 게 인지상정. 책보는 쌩쌩의 모습은 시리즈로 그리고 싶다. 쌩쌩은 책을 자주 읽는다. 그는 다양한 자세로 책을 많이 읽기 때문에 시리즈로 그려봄직하다. 사람이나 움직이는 생물을 그릴 때는 빠르게 쉭 잡아 그려야 하는 긴장감이 있다. 사물은 오래도록 지긋이 관찰하며 그리는 맛이 있고. 근데 분명 눈을 내리깔고 책을 보고 있는건데 난 왜 눈을 감은 것처럼 그려버렸을까. 책에 동그랗게 그려진 부분은 남산도서책이라 표시된 도장이 찍힌 부분. 왠지 그 부분에 포인트가 가는 것 같다. 사실 빠르게 봐야해서 놓치는 부분이 많다. 다음 번엔 사진에..

외눈박이

자고 있는 이음이의 손이 너무 귀여워서 그리기 시작했었다. 살짝 주먹 쥔 손. 손가락으로 잡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그런데 귀여운 손의 느낌을, 잡아주고 싶은 손의 느낌을 그려내지 못했다. 그래서 괜히 손 말고 딴데다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불과 이음이 내복 무늬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불무늬도 이음이 내복 무늬도 어렵지만 손이랑 눈, 코, 입 그리기는 정말 어렵다. 감은 눈그리기도 어려운데 뜬 눈은 오죽할까. 흠 결국 위치도 애매하게 잡아서 가운데 눈 하나 있는 외눈박이 얼굴이 되었다. 연습이 필요하다!

예술가들의 작업노트

2년전에 서점에서 란 책을 들춰보다 노트를 사서 볼펜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두달정도 하다가 말았다. 노트에 써놓은 것처럼, 무언가를 오래도록 쳐다보고 있는데도 보이는 것을 다 그리지 못한다. 그런데 웃기게도 보이지 않는 걸 그리는 일도 동시에 한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재밌다. 무언가를 자세히 오래도록 쳐다봐야하는 일도 좋고. 다시 스케치북을 펼치고 그림을 그려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