쌩쌩 방/책

우치다 타츠루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 2. 공동체와 버티기

쌩쌩 2014. 7. 1. 20:33

 개인적인 차원에서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이루는 방법.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일단 세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1. 버티기               2.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천천히 만들어 가기            3. 질르고 사과하기

 

 책에 나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어떻게 얽혀 들어갈 수 있을지 전혀 감을 못 잡은 상태에서 막 질러보았는데..

니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니 끝은 창대할 것인지 궁금하다.

 

 저 세가지 방법은 개인적인 스타일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공동체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먼저 있어야 할 것이겠지만 일단 대충 어떤 조직들이라 생각해도 무방 할 것 같기도 하고 아니라면 누군가가 이야기한 공동체와 결사체라는 구분으로 공동체를 생각해 봐도 되고 유행하고 있는 마을 만들기의 '마을'이라고 생각해도 되고 아니면 네트워크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여기서 '지속 가능하게'란 말은 순전히 개인적으로 내가 어떤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을 때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지속적으로 버틸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한 이야기다.

 

 

 

 

 일단 이 책에서 1980년대부터 일본사회에서는 모든 공동체가 무너져 버렸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니까 공동체가 필요없어진거다. 이 때의 공동체라는 말은 결국 다른 사람과 상부상조하며 살아가는 어떤 시스템을 일컫는다. 서로 돕는다는 의미는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서로 나누며 살아왔단 말일 것 같은데 어찌하다가 너무 풍요로워지니 돈을 내면 무엇이든지 다 살 수 있다란 관념이 사람들에게 머리박히게 되어 무너져버린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저임금에 저녁이 없는 삶이 지속되니.. 어떤이는 대기업에 들어가 짧고 굵게 돈 벌어 나와서 자영업 해서 부자가 되어서 이를 해결하리라 하는 사람이 생기고 어떤이는 박봉이라도 공무원이 되서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하다가 60살 부터는 연금을 받아서 걱정없이 살겠다고 하는 이가 생기고 어떤이는 빚내서 주식투자에 부동산투자로 한탕 노려보기도 한다. 결국 궁극적으로 돈에 대한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치다 선생님과 오카다씨는 이러한 사회적 요청에 응하기 위해 공동체를 만들어 내자고 생각한다. 

"젊은 사람들은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도, 운영하는 방법도, 거기에서 어떤 곤란이 속출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는

지 등등 거의 아무것도 모릅니다."

 

 점점 '생활을 방어하기 위한 자위조직'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 이제 당연해 보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공동체 조직의 기본원리로 '증여 한방'을 말한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원리인 것 같다. 끊임없는 교환관계에 익숙해져서인것 같은데, 내가 가진 언어로 이해를 해 본다면 우리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고 함께 살아가니 증여하지 않으면 결국 궁극적으로 생존조차 할 수 없다란 말로 이해해 본다. 그러다 보면 행복이란 아마 증여 한방으로 찾아오는 것 같다. 그러니 '못해 먹겠다'가 아니라 '죽 써서 개 줄 수 없다'인가?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교환관계에 익숙해져 있는 지금 정말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일 것이다. 공동체란 분명히 교환관계 너머 약자, 이해관계가 다른 이 등과 함께 살아가는 일일 터인데 그 놈의 교환관계만의 논리 침투는 많은 것들을 파괴하고 배제해 버리는 것 같다. 그리고 분명히 교환관계만으로 살아가게 되었을 때의 감정이라는 녀석은 정말 딱 우월감, 모욕, 열등감 등으로 점철되어져 버릴 것 같기도 하다.

 

 이 부분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책은 시작을 하는데..

 

 다시 처음에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서 젊은 사람으로써 전수받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공동체를 만들고 운영하는 방법들'에서 개인적으로 나의 스타일은 '2번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천천히 만들어가기'였다. 하지만 책에서도 맨처음에 다루듯이 계속 생각이 다가가는 부분은 나의 감정이다. 왜 그러냐면 아무리 '증여'하는 삶을 추구하고 행복이란 그러한 것에서 찾아온다고 여기지만 그리고 생존의 문제에까지 그것이 오히려 현실적이라고 믿지만서도  공동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논리들 안에서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는 것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상처를 공론장을 통해 해소하고 또 함께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여기지만서도 닫아 버리고자 하는 마음도 한켠에 남아 있다. 그것이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공동체를 개인적으로 떠나 버리는 문제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아직 나에게는 아무리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천천히 함께 만들어나가고자 했을 때라도 감정의 문제는 남아버리는 것 같다. 나머지 두가지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감정의 문제는 계속 남지 않을까 하는데 그래도 그냥 침묵하면서 버티는 사람들이 있을 성 싶고 아니면 막 질르고 사과하며 감정을 해소하며 그 곳에서 버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인데 난 그 감정을 즐기는 것으로 승화하고자 했었다.

 

즉, 일명 '변태같은 마음' = 인간은 기본적으로 폭력적이고 차이는 발생할 수 밖에 없으며 갈등은 줄일 수는 있어도 제거할 수는 없잖아. 그러니 이러한 것들을 모두 들여다 보면서 하나하나 저 알 수 없을 것 같은 전제에 이르기까지 이르러서 모든 것들을 해체해보는 작업들까지 해보면서 지금 이순간 할 수 있는 만큼 한계를 파악하면서 천천히 해결하며 만들어 가보자!! 역시 재미있군..

 

이랬더랬다.

 

 한데 해결 할 수 없는 지점들, 어떤 관념적인 벽에 부딪히면서 갑자기 모든 책임과 부담감이 엄습해 버리니.. 도망치고 싶어진다. 많은 책임들을 나누고 서로 이야기 나누는 문화를 만들려고 노력했던 것들이 오히려 부담감으로 작용해 버리니 이대로 도망쳐 버리자. 그래 다시는 그러한 일은 하지 말고 어떤 일정한 틀이 지어진 일들이나 하면서 조용히 살자라고 말이다.

 

 또 한번 저 깊은 허무주의로 빠져버리고 싶어진다.

 

여기서는 물러 설수는 없다란 각오를 다지고 싶어서인지, 일단은...

 

두가지 선택지를 남겨둔다. 1. 부담감을 떨치던가(맷집 키우기), 2. 아니면 나의 한계에 맞는 부담감 정도의 옷을 입고 일하기.

 

'맷집 키우는 것'이 책에서 말하는 '어떤 곤경에 처해도 생긋생긋 웃을 수 있는 힘' 같은 건가 아니면 변태같은 마음이었던 걸까?

 

아니면 레벨 업된 변태같은 마음?

 

복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