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책장

기형도 <입속의 검은 잎> 2

 잔잔 2016. 5. 19. 19:35

 

19
나의 졸음은 질나쁜 성냥처럼 금방 꺼져버린다. (鳥致院)

 

 

70

그러나 기다림이란 마치 용서와도 같아 언제나 육체를 지치게 하는 법 (포도밭 묘지1)

 

 

72-73

묻지 말라, 이곳에서 너희가 완전히 불행해질수 없는 이유는

神이 우리에게 괴로워할 권리를 스스로 사들이는 법을 아름다움이라 가르쳤기 때문이다. (포도밭 묘지2)

 

 

92

오래지 않아

3

우리는 완전히 그를 잊었다. 그는 그 해 가을 우리 마을에 잠시 머물다 떠난 떠돌이 사내였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는 우리가 꾸며낸 이야기였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저녁마다 연필을 깎다가 잠드는 버릇을 지금까지 버리지 못했다. (집시의 시집)

 

 

93

살아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들의 얽힌 영토 속에서

한 뼘의 폭풍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 (나리나래 개나리)

 

 

95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바랍의 집-겨울版畵1)

 

 

96

한낮의 눈보라는 자꾸만 가난 주위로 뭉쳤지만 밤이면 공중여기저기에 빛나는 얼음 조각들이 박혀있었다. (삼촌의 죽음-겨울版畵4)

 

 

107

뒤엉켜 죽은 망초꽃들이 휘익휘익 공중에서 말하고 지나갔다. (沙江里)

 

 

122

잃어버린 것은 찾지 않네. 그럴만큼 시간은 여유가 없어. 잃어버려야 할 것들을 점검중이지. 그럴만큼의 시간만 있으니까. (종이달)

 

 

125

소리1

 

아주 작았지만 무슨 소리가 들린 듯도 하여 내가

무심코 커튼을 걷었을 때, 맞은편 3층 건물의 어느

창문이 열리고 하얀 손목이 하나 튀어나와 시들은

푸른 꽃 서너 송이를 거리로 집어던지는 것이 보였

다. 이파리들은 잠시 공중에 떠 있어나볼까 하는 듯

나풀거리다가 제각기 다른 속도로 아래를 향해 천천

히 떨어져내렸다. 나는 테이블로 돌아와 묵은 신문

들을 뒤적였다. 그가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희미한 빛깔이 조금 고여 있었

다. 스위치를 내릴까 하고 팔목시계를 보았을 때 바

늘은 이미 멈춰 있었다. 나는 헛일삼아 바을을 하루

만큼 뒤로 돌렸다. '어디로 가시렵니까' 내가 대답

을 들을 필요조차 없다는 듯한 말투로 물었을 때 그

는 소란하게 웃었다. '그냥 거리로요' 출입구 쪽 계

단에서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

위에, 명함꽂이, 만년필, 재떨이 등 모든 형체를 갖

춘 것들마다 제각기 엷은 그늘이 바삭 붙어 있는 게

보였고 무심결 나는 의자 뒤로 고개를 꺾었다. 아주

작았지만 이번에도 나는 그 소리를 들었다. 다시 창

가로 다가갔을 때 늘상 보아왔던 차갑고 축축한 바

람이 거리이 아주 작은 빈곳까지 들추며 지나갔다.

'빈틈이 없는 사물들이 어디 있을려구요' 맞은편 옆

건물 2층 창문 밖으로 길게 삐져나온 더러운 분홍빛

커튼이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 섭섭하다는 듯 부드럽

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버려두세요. 뭐든지 시작하

고 있다는 것은 아릅답지 않습니까?' 그는 깜빡 잊

었다는 듯이 캐비닛 속에서 장갑을 꺼내면서 덧붙였

다. '아니, 그냥 움직이고 있는 것일지라두 말이

죠.' 먹다 버린 굳은 빵쪼가리가 엄숙한 표정으로

할 수 없지 않느냐는 듯 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어둠과 거리는 늘상 보던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일

어나 천장에 대고 조그맣게 말했다. '나는 압핀처럼

꽂혀 있었답니다' 그가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희미한 빛깔이 조금 고여 있었

다. '아무도 없을 때는 발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리

는 법이죠.' 스위치를 내릴 때 무슨 소리가 들렸다.

내 가슴 알 수 없는 곳에서 무엇인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익숙한 그 소리는 분명히 내게

들렸다.

 

 

 

 

 

 

 

 

기형도 시집을 읽으면서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 <대성당>,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도 읽고 있었다. 두 작가를 같이 읽어야지,

한건 아니고 도서관에 갔다가 전에, 그렇다면 레이먼드 카버를 읽으라던 신형철님의 문장이 떠올라 단편집을 빌려왔던 것.

 

기형도와 레이먼드 카버를 읽으면서 느껴지는 공통의 어떤 느낌들이 있었다. 어둡다랄까, 밝지 않다랄까 하는 전체적인 분위기.

그리고 그런 인물들 내면의 섬세한 독백같은 것들. 또 소리. 귀와 눈..

 

기형도시집의 끝에 실린 해설은 김현선생님이 쓰셨는데, 기형도의 표현형식을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하셨다. 기괴한 이미지, 죽음(무덤)을 향한

방향성 같은 것들이 그로테스크하지만 그 안에 반영되어 있는 어떤 현실성같은 것들이 있다는 것.

 

레이먼드카버의 단편집 끝에 실린 해설은 작가 김연수가 썼다. 번역도 그가 했고.

거기 설명에, 1983년 영국 문예지 그랜타에서 레이먼드 카버의 표현형식을 '더티 리얼리즘'이라 명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을 다루되 실제보다 가혹하게 쓰여졌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기형도의 <소리1>이라는 시를 읽으면서, 자신의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툭 끊어지는 소리를 듣는 이 인물은 막연히

카버의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한 인물같다고 생각했다.

아주 사소한 것까지 볼 수 있거나 아주 작은 소리라도 들을 수 있는 그런 인물들이 자꾸 주변에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리얼리즘'에 대해 잠깐 고민해본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묘사, 재현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전에 중남미소설에 관한 수업을 들은적 있다. 마술적 사실주의라 포장되어 소비되는 중남미소설들에 대해

중남미소설작가들은 마술적 사실주의가 아니다 라고 했다. 자신들에겐 그저 경이로운 현실이 있을 뿐이라고 했던가.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더티 리얼리즘, 마술적 사실주의.

리얼리즘, 사실주의 앞에 붙히지 못할 형용사가 있을까 싶다.

저 사람이 사는 현실이 다르고 이 사람이 사는 현실이 다르며 한 사람 한 사람의 현실이 각기 다를텐데, 그렇다면 리얼리즘은

얼마나 많은 종류가 될까, 그런 생각.

 

기형도와 레이먼드 카버의 현실속에 빠져 있다가 나의 현실을 들여다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