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책장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잔잔 2015. 8. 25. 22:22

 

 

 

 

<잎 속의 검은 잎>이라는 제목의 기형도 시집을 읽고있다. 집 책꽂이 위쪽에 꽂혀있었는데 라디오를 듣다가 갑작스레 꺼내들었다.

1960년에 태어나 1989년에 죽은 시인. 이루지 못한 사랑을 빈방에 가둔 시인.

어릴 때 아버지가 아프셔서 어머니 혼자 생계를 꾸리셨는데 엄청 가난했다고 한다. 아마 어렸을 때 빈방에 홀로 있던 시간도 많았을 거라, 다른 이들이 느끼는 것 만큼, 슬픈 사랑을 빈방에 가두어놓는다는 이야기가 그에게는 낯선 풍경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인생을 증오하며, 기적을 믿지 않는다고 시에서 그는 말한다.

어둡다.

 

하지만 그의 시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물론 어두운 인물들이지만.

컴컴한 마음을 추상적으로 표현하기보다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로 들려주는 시들이 내게는 밟혔다.

그의 시에는 폐렴으로 둘째를 잃은 목사도 나오고, 오후 4시 블라인드를 내렸다 올리며 눈물흘리는 회사원 김씨도 나오고, 가게문을 닫고 추억에 젖었다가 독한 술을 입에 부어넣는 주인도, 어느 가게에 들어가 앉은 반백의 사내도 나온다.

 

 

 

 

소리의 뼈

 

김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

모두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아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

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이런 블랙유머의 시도 보인다. 또 있다.

 

 

홀린사람

 

사회자가 외쳤다

여기 일생 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

이웃의 슬픔은 이분의 슬픔이었고

이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

이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

보라, 이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때 누군가 그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

그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

저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

그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홀린사람'을 읽고는 얼마전에 봤던 영화 <소수의견>에서 검사가 했던 마지막 대사가 떠올랐다.

나는 봉사를 했고 그이는 희생을 했는데 넌 뭘했냐, 던 그 물음. 봉사와 희생에 관한 이미지가 두려움으로 바뀌었던 그 대사.

 

아무튼 생각했던 것 보다 기형도의 시집이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