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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꿈을 빌려드립니다>

 잔잔 2021. 11. 9. 14:19

다른 눈, 다른 세계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포장되어 소비되는 중남미소설,이라는 내용에 대해서 어떤 중남미 소설 작가가 우리의 소설은 마술적사실주의가 아니다, 단지 우리에겐 경이로운 현실이 있을 뿐이라고 답했다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무작정 멋지다고 생각했다.

 

 

내 책들 중에서 단 한 줄도 그곳에서 일어났던 실제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꿈을 빌려드립니다』 ‘문학과 현실에 관하여’ 216p)

 

  역시 자신의 경이로운 현실을 이야기로 옮기는 대작가 마르케스의 <꿈을 빌려드립니다>에는 9편의 단편과 9편의 산문, 그리고 2편의 작가에 관한 글과 인터뷰가 실려 있다. 실제로 그들의 소설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기에, 약간의 기대와 한 가지의 질문을 안고 차례를 무시한 채 끌리는 제목대로 읽어 내려갔다.

 

 

  작중 화자로 등장하는 ‘나’가 자신이 만난 잊을 수 없는 인물과의 만남부터 이별 혹은 최근 소식을 전하는 형식의 두 편의 이야기, 아니 마르케스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여기 그가 만난 어떤 두 사람이 있다. 첫 번째 사람은 '꿈을 빌려드립니다‘의 프라우 프리다라는 여인이다. 그녀는 자신이 꾼 꿈을 통해 타인의 미래를 내다본다. 일종의 예지몽을 꾸는 것. 그래서 꿈을 빌려주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 신비로운 여인을 알고 있던 ‘나’는 해일이 들이닥친 어느 맑은 날, 그 해일에 의해 공중으로 떠밀려 호텔벽면에 처박힌 자동차 속에서 죽은 한 여인의 사진을 신문에서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여인이 손에 끼고 있던 뱀 모양의 반지로 인해 그녀가 바로 프라우 프리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34년 전 처음 만난 그녀를 떠올리게 된다.

  두 번째 사람은 ’로마에서의 기적‘의 마르가리토 두아르테이다. 그는 아내와 사별하고, 일곱 살 된 딸마저 열병으로 잃는다. 딸이 죽고 11년 후 마을에 댐을 건설하기 위해 공동묘지를 이장하게 되는데, 딸의 시신이 하나도 썩지 않고, 무게도 나가지 않았다. 이 기적을 바티칸의 교황에게 알리기 위해 마을에서 모금운동이 벌어지고 마침내 그는 로마로 가게 된다. 그리고 로마에서 실험영화 제작소에 있던 ‘나’는 룸메이트와 고향이 같은 마르가리토를 만나게 된다. 성녀가 된 자신의 죽은 딸을 데리고 교황을 만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의 이야기는 작가들에게 훌륭한 소재였다. 당시 제작소의 시나리오선생님이었던 차바티니는 마르가리토야 말로 성인이며 그가 딸의 부활을 이끈다는 내용의 시나리오를 제안하지만 영화로 제작하지 못한다. 그리고 22년 뒤 ‘나’는 그를 다시 만난다. 그는 늙고 지쳤지만, 당시의 그 눈빛과 성녀를 데리고 교황을 만나고자 하는 바람만은 여전했다.

  마르케스가 만난 두 인물은 소설 속에서나 만날 수 있을 법한 내력을 지녔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자신이 만났던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듯 그들의 삶을, 자신이 만나고 보았던 그들의 모습을 그저 들려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러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떤 의미나 메시지를 주려한다기보다). 그리고 이렇게 신비롭거나 혹은 기괴하거나 때론 기적처럼 비극적이거나 하는 인물들은 9편의 이야기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등장한다.

  인물뿐 아니라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역시 흥미롭고 신비하다. 카리브해 연안에서 태어난 작가여서 일까, 바다의 이야기를 풀어낸 ‘잃어버린 시간의 바다’ 속 공간이 가장 풍요롭게 그려진다. 악취를 풍겨내는 바다가 어느 날 장미향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향이 불러오는 마을의 변화를 환상적으로 보여준다. 이야기 속에서 흐르는 시간도 일반적으로 흐르지 않는 듯 느껴지는데, 예를 들면 바다의 변화를 기다리는 어떤 남자에 관해 ‘그는 너무도 오랜 세월을 기다렸기 때문에 그런 기다림은 그의 존재양식이 되어버렸다(127p)’라는 표현이라든가, 바다 속으로 먹을 것을 찾으러 잠수해 어떤 마을을 둘러보고 태연하게 돌아오는 장면 등이 그렇다.

  마르케스는 주인공이 어느 날 거대한 벌레로 변해 깨어났다는 카프카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것에 어떤 상징이나 의미가 있을 것이라기보다 대체 무슨 벌레였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졌다면서, 자신을 작가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는 순진한 독자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우리가 기적이라 일컫는 일들이 실제로, 또 숱하게 존재하지만, 단지 우리의 눈이 이성주의라는 어둠에 가려져있기 때문에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언뜻 들으면 혹시 마르케스는 자기만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책 말미에 실린 <어느 납치 소식>이라는 르포를 쓴 것에 관한 인터뷰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수 있다. 마약밀수업자들이 권력을 주무르고,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온갖 정치적 갈등과 폭행, 납치, 살인이 난무하는 곳. 작가는 그런 콜롬비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종종 허구를 넘어서는 콜롬비아의 현실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그는 폭력은 콜롬비아의 역사적 자양분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은 그러한 폭력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웠고, 폭력과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지도 않고, 현실을 부정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른 눈을 가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로 다른 세계가 있기 때문일까. 그의 소설을 읽기 전부터 품고 있던 한 가지 질문이었다. 어쩌면 결국 다른 세계는 다른 눈을 가진 이들에게만 보이는 것일지도.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그들이 다른 눈을 가진 게 아니라, 내가 본 적 없고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가 있다, 있을 수도 있다, 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다른 세계를 상상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다른 눈을 가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다른 눈을 가지고 나의 현실을 바라본다면 또 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질까. 마르케스의 이야기들이 자꾸만 다른 세계를 바라보고 싶게끔 나를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