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 방/스케치북

한장의 그림이 불러온 시

 잔잔 2016. 5. 20. 13:45

용산 해방촌에 살던 집.

안방에서 문을 열고 있으면 거실 남향창으로 햇볕이 방까지 잔뜩 들어왔다.

뱃속에 있던 이음이와 따뜻한 겨울 햇살을 쬐고 있었다.

5일전 크리스마스날 이사를 마치고, 정리가 끝난 집에서 그때 나는 이 그림을 그리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 집은 잘 있을까.

거실에는 노랑, 작은방엔 파랑색 페인트칠이 되있었는데 우리가 이사가면서 도배를 했었다.

 

 

그림 속에 손잡이가 보이는 열려있는 문이 작은 방 문이다.

작은 방 파랑벽에 내가 2012년의 애송시로 적어두었던 김경미의 시 <야채사>가 떠오른다.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의 입에 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맛없었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꽃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꽃 수북했겠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

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 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 나왔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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