쌩쌩 방/책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 -권혁범-

쌩쌩 2021. 11. 10. 14:16

 

나는 페미니스트다."

 

 

 

  

기초강의를 듣고 책을 읽으면서 나와 아내의 관계를 되 집어 본다든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바라보았던 이런저런 모습들의 폭력성을 알게 되면서 이제는 정말로(?)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선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선언한다는 것이 과연 허위의식이 없는 언명이 될 수 있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하나는 책의 저자가 남성에 대한 분류 중에서 세 번째에 해당하는 가장 위험한 부류하고는 약간 다르지만 가부장적인 정서나 세계관에서 사실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면서나는 여성주의자라는 언명을 통해 허영적인 느낌을 가지고 자신을 포장하는 사람이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고 둘은 위와 비슷하게 강의나 책을 통해서도 이야기 하듯이 남자가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에서 나오는 느낌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선언 하는 것은 분명 가능하다(?)라는 생각도 해 본다.

 

강의를 듣고 나서 책을 읽어서인지 책의 목차와는 상관없이 기초강의를 통해서 그린 그림을 가지고 책의 많은 내용들을 그 그림 안으로 들어오게 하기도 하고 그 그림 안으로 들어오기가 애매한 이야기는 따로 배치하면서 이해했다. 지금에서야 정리를 하는 것이긴 한데, 거칠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관점(새로운 인식론)으로서의 여성주의와 계급문제에 대한 것이다.

 

여성 운동이 곧 인권운동이다’, ‘너의 인권이 여기에 있다란 표현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예전에 여성학 수업을 들으면서도 줄기차게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그 명제인데 어느덧 나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아가면서 체화된 남성다움으로 단지 그 명제를 교양지식으로만 알고 스타일의 차이, 정도의 차이란 합리화된 논리로, 특권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는지 모른다. “특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특권을 모른다.”라는 말씀과 가장 환영해야 할 것은 (불편해야 할 것이 아니라) 약자의 목소리다란 말씀에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내와 함께 육아와 관련된 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가사노동이나 다른 여타의 일들에 대해서는 일을 나누면서 충분히 합의를 하고 잘 지내오지만 왠지 육아와 관련해서는 쉽사리 합의를 보지 못하고 스타일의 차이라던가 정도의 차이라는 논리들을 가지고 대응해 오고 있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라”, “그냥 내버려 둬라그러면서 한편으론 무임승차해도 괜찮다는 말은 아니지만 우리가 하는 일들이 완전한 등가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완전한 등가는 환상이다란 거대한 썰을 풀면서 나 자신을 두둔했다. 아내는 가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는 차이라는 말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나와 아내와의 입장에 질문을 던져 그 구조도 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고만 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만을 추구하는 결과가 되지 않았나 싶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단지 우리가 이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너가 밖에 나가서 일하고 내가 집에서 애들을 보는 거다란 말을 하고 그것으로 나도 그 구조를 보고 있다란 허영만 채웠을 뿐 내가 근본적으로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육아란 고도의 논리만 내세웠을 뿐이다. 여기에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선 마을이 필요하다란 말은 무슨 거지같은 소리인가.

 

관점으로서의 여성주의는 지난 5000년 너머 인간이 아니었던 여성의 입장에서, 약자의 입장에서 젠더위계를 비판하고 해체하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지향을 갖는다. 여기서 페미니즘의 위대한 역설이 생긴다. , “여성운동은 사회 내 여성의 지위를 논하자는 게 아니라(”이렇게 억압 받는다“), 여성의 시각으로 역사, 사회, 정치를 재구성하자는 것이다.”(정희진, 2006) 다시 말하면, 여성이 남성의 지위를 끌어내려 그곳을 차지하려는 지위향상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룰(이데올로기)에 대해 질문을 해 보고 여성을 여성으로 묶지 않으며 아무도 지지 않는 다른 삶에 대해 상상해보자는 것이다.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은 본질이 아니며 타자와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정체성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본질인양 우리의 성문화를 이루며 성차별 매커니즘을 만들어낸다.

 

이와 관련해 논리와 논리가 꼬리를 문 수많은 지배적인 주장(관념)과 의견, 행태들을 강의와 책을 통해서 살펴 볼 수 있었다. “나는 부드러운 페미니즘이 좋다라는 어떤 이의 책에 대한 이야기, 여성주의는 왠지 쎄다라는 감정들, “나는 페미니즘 말고 휴머니즘 할래요란 말, 전체적인 구조를 보지 못하고 이제 역차별이다란 생각, ‘소녀들의 심리학이란 책, 공적인 남성, 사적인 여성, 순결이라는 표현, 외화번역에 스며든 성차별언어관습, 성차별듀엣, IMF시대의 남편 기 살리기 운동, 피해자에게 책임 전가하는 말, 스위트 홈 이데올로기, 등이다. 듣고 읽으면서 나는 얼마나 차별에 대한 감수성을 느끼지 못하고 수많은 폭력들의 공모자였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저자의 말씀처럼 여성문제는 남의 문제,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문제이며 나의 문제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규정하는 남성성으로 나도 피해자다라면서 왜 남자를 적으로 만드냐고 항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강제하는 남성성으로 많은 것을 빼앗아 가는 것은 맞지만 여성 억압체제는 누가 누군가의 적들의 정치학이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가 아닌가? 사회적 강자인 남성은 여성의 입장에 서서 함께 연대할 때, 마찬가지로 수많은 상대적 주변인들과 함께 연대할 때 객관이라는 특권들의 주관’(폭력)을 해체하며 갈등일 수 밖에 없는 민주주의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