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 방/공책

연환화 342점 <그림전기 루쉰> 왕시룽, 뤄시셴

 잔잔 2016. 3. 29. 14:46

도서관에 갔다가 신간코너에 있길래 뽑아봤다. 표지에 있는 그림체가 맘에 들었다.

그림전기라니. 내가 살면서 가장 여러번 읽은 책을 쓴 루쉰(1881.9-1936.10)의 그림전기라니.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큐정전은 내가 살면서 가장 여러번 읽은 책이다. 친구들과 연극을 하려고 아큐정전을 계속 읽으면서 대본을 만들었다. 세미나를 통해서 연극작업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그 후로도 극단을 꾸려서 세번 정도 공연을 했다. 어째서 아큐정전이었는지는 안타깝게도, 머리를 쥐어짜봐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아큐정전이었고 아큐정전을 계속해서 읽었다. 그러니까 내가 고른 책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책이었다. 우연히 주어진 책이 내 삶에 기나긴 시간동안 꽤 많은양의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걸 느끼니 새삼 놀랍다.

 

페이지를 넘겨가면서 왜 그때 나는 루쉰의 평전이나 전기를 읽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읽었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도 덧붙여서. 어쩄든 그리하여 나는 <그림전기 루쉰>을 읽었다.

 

이 책은 연환화342점과 4-5줄로 이뤄진 342개의 문단으로 이루어져있다. 연환화連環畵는 간단하게 중국식 이야기 그림책이라고 볼 수있다. 역사는 고대로 거슬러 가지만 오늘날의 연환화는 놀랍게도 20세기 초 상하이에서 루쉰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내용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전기를 읽어보면 루쉰은 다방면으로 재능이 뛰어나다. 소설과 잡문을 쓰는 작가이면서 불어, 러시아어, 일어 작품들을 번역하는 번역가이기도 하며 그림, 판화등에도 관심이 지대했다. 루쉰은 상하이에서 청년들과 함께 신문화운동의 일환으로 목각강습을 하는데 아마 그때부터 오늘날의 연환화가 빛을 내기 시작했나보다. 그러한 연환화로 자신의 화전畵傳이 출판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떨까. 내가 괜히 감회가 새로웠달까.

루쉰의 생애를 훑으면서 나는 역시 전에도 어렴풋이 그렇게 느꼈지만, 그는 진지하고 어쩌면 너무 무겁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론 분명한 소명의식같은 것을 품고 그대로 살아가는 그가 부럽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 당시 중국의 시대와 배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루쉰이 현대에 태어나도 비슷하게 살아갔으리라 상상되는 걸 보면 어쩌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름에 대하여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지어주고 대개는 평생 그 이름 하나로 살아간다. 하지만 루쉰이 살았던 당시의 중국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과 자, 아명에 법명까지 지어주었다. 루쉰의 본명은 장서우, 자는 위산, 아명은 아장이었고 법명은 장건이었다. 그러다 일곱살때 할아버지가 루쉰의 자가 우산처럼 들린다하여 위차이로 바꾸어주었다. 1898년 5월 루쉰은 난징의 군사학교 학생이 되면서 군인이 되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고 따라서 최소한 본명은 사용해서는 안된다 생각하여 본명 장서우를 저우수런으로 개명했다. 또 스스로 '알검생(검을 벼리는 서생)'이라는 호를 붙이기도 한다. 그리고 1918년 5월 루쉰은 '루쉰'이라는 필명으로 <광인일기>를 발표하고 이때부터 필명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루쉰'은 어머니 루루이의 성을 따른 것이었다. 삶을 살면서 계속해서 바뀌는 혹 바꾸는 이름들이 역시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이름으로 사는 것보다 오히려 바뀌는 이름들 속에서 그 삶의 일관성같은 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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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열한 살의 위차이는 집에서 가까운 삼미서옥三味書屋에 들어갔다. 사오싱성을 통틀어 가장 엄격하기로 유명한 사숙이었다. '삼미'라는 이름은 "경전을 읽는 맛은 곡식 맛과 같고, 역사를 읽는 맛은 성찬과 같고, 제자백가를 읽는 것은 젓갈과 같다"라는 뜻에서 나왔다고 한다. 일설에는 청빈한 삶을 좋아하고 독서를 즐긴다는 뜻의 "무명옷은 따뜻하고, 채소뿌리는 달고, 시서詩書를 읽는 맛은 오래간다"라는 말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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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일찍 다가온 인생의 좌절로 위차이는 어리둥절했고 화가 났다. 교양이 넘치던 그는 말이 없어졌고 장난꾸러이기이던 그는 혼자있는 것을 좋아했다. 1894년 봄 할아버지의 죄에 연루될 위험성이 줄어들었다. 다시 삼미서옥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림 베끼기에 빠져들었다. 선생님이 책 읽는 데 정신이 팔려 있을 때면 <탕구지>, <서유기>, <야채보>등에 나오는 그림을 베끼며 미술에 대한 흥미를 키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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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하고 답답한 기분으로 위차이는 수업이 끝나면 고서를 베끼기 시작했다. 몇해 안되는 동안 <다경> 등 여러책을 베꼈다. 훗날 고서 베끼기 작업의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이와 동시에 잡학을 섭렵했다. 위차이는 사숙 선생님 서우징우처럼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한 팔고문에는 흥미가 없었다. 틈만 나면 야사, 잡설, 자연과학 책을 읽었다. 그의 지식은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광범위해졌고 훗날 잡문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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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사상의 영향으로 수런은 분발했고 의기양양했다. 수업이 없으면 말타기 연습을 즐겼고 기인자제들과 경주를 벌였다. 한번은 말을 타고 청의 군영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는 '융마서생(군인서생)'이라는 네글자의 도장을 새기고 스스로 '알검생(검을 벼리는 서생)"이라는 호를 붙여 검을 들고 말을 타고 단호하게 싸우러 나가겠다는 결의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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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일본유학시절 어린아이들이 변발을 돼지꼬리대머리라고 놀린 일)은 수런을 더욱 분발하게 했다. "천하에서 지식을 구하고 세계에서 학문을 찾"으며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공부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일본어, 영어, 수학, 물리, 화학, 세계사, 지리, 동식물학, 회화 말고도 기갈이 든 것처럼 온갖 서양의 과학과 문화 관련서적들을 찾아 읽었다. 일본에 오기 전 일본어를 배운적이 없었지만 이듬해에는 번역을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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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4월 수런은 고분학우너을 졸업했다. 규정에 따르면 도쿄제국대학 공과 채광야금학과에 진학해야 했다. 그런데 수런은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새로운 의학이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꿈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졸업뒤 귀국하여 그의 부친과 같은 환자의 고통을 치료할 생각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군의관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들에게 유신에 대한 믿음을 촉진시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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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생각했다. 의학은 결코 급한 일이 아니다. 무릇 어리석고 약한 국민은 설령 체격이 아무리 건강하고 튼튼하더라도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조리돌림의 소재나 구경꾼 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병으로 죽는 사람들이 좀 있다고 한들 꼭 불행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첫번째 방법은 사람들의 정신을 바꾸는 것이다.

 

95

그는 사람의 정신을 바꾸는 데 제일 좋은 것은 당연히 문예라고 생각했다. 고통스런 숙고 후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열심히 추구하던 의학 구국의 길을 포기하고 문예활동에 종사하여 중국인의 정신으로 바꾸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의학을 버리고 문학에 종사하(棄醫從文)"게 만든 사건이다.

 

 

272

루쉰은 중산대학 문학과주임 겸 교무주임을 맡고 번잡한 교학 업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금방 광저우도 결코 만족스러운 데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광저우 지방은 그야말로 너무나 적막해졌다." 중산대학의 "속사정이 너무 복잡해서 정녕 한 마디로 다 말하기 어려웠"고, "혁명의 발원지는 이제 혁명의 후방, 게다가 회색으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348

1931년 8월 17일에 루쉰은 하계목각강습반을 열었다. 목각판화운동의 신진 세력을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우치야마 간조의 친동생으로 일본 세이조학교 교사 우치야마 가키스를 강사로 초빙하고 자신이 통역을 맡았다. 이바이사, 중화예대, 상하이미전, 상하이예전, 바이어화회 등에서 수강생들이 모였다. 일주일간 계속된 이 강습반은 중국에서의 판화운동의 시작을 의미한다.

 

362

리례원을 이어 편집을 맡은 장쯔성은 공교롭게도 루쉰의 학생이었다. 루쉰은 필명을 바꾸어 가며 지속적으로 <자유담>에 글을 발표했다. 당국의 문화토벌을 강력하게 돌파함으로써 중국 현대 잡문역사에 새로운 단계를 열었다. 1933, 1934년 두 해동안 루쉰이 사용한 필명은 무려 60여 개에 이른다.

 

379

그는 청년작가들을 육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샤오쥔, 샤오홍, 쉬마오융, 예쯔, 쑨융 등을 세심하게 지도하고 그들의 작품의 출판을 도왔다. 루쉰은 <중국신문학대계 소설2집>을 편집하면서 가능한 많은 청년작가들의 작품을 수록했다. 그들의 성장을 돕기 위해서였다.

 

387

루쉰은 병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일을 했다. 상하이에서 지낸 10년동안 쓰고 편집하고 번역하고 교정한 글의 분량은 이전 20년 동안에 쓴 양의 총량과 비슷하고 임종전 3년 동안 한 일은 그 이전 6년 동안의 총량과 비슷했다. 병마속에서 루쉰은 <죽은 혼> 제 2부를 번역했다.

 

388

6월 5일부터는 극도로 쇠약해졌다. 30년 동안 거르지 않았던 일기쓰기를 중단했다. 이 와중에도 루쉰은 구술로 쓴 글을 발표했다. 6월 말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8월에는 병세가 좀 호전되는 듯했다. 다시 글쓰기에 전력을 다했다.

 

389

1936년 10월 8일 제 2회 전국목각연합전람회가 상하이 바셴차오청년회건물에서 열렸다. 루쉰은 이번전시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신병을 앓으면서도 전람회를 참관하고 그 자리에서 청년 목각인들과 여러 시간 동안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일로 청년들은 한껏 고무되었다. 이날은 그가 세상을 뜨기 겨우 열하루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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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아침 급히 의사를 불러 몇 가지 처치를 했으나 호전되지 않았다. 온종일 가쁜 숨으로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1936년 10월 19일 새벽 5시 25분 루쉰은 세상과 영원히 이별했다. 폐기종 파열로 생긴 기흉이 심장을 압박했던 것이다.

 

 

*그림 베끼기, 고문 베끼기. 루쉰의 공부방법은 베끼기였다. 베끼자!

 

*전기를 다 읽고나서 루쉰과 쉬광핑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하이잉의 서문을 보게 되었다. 루쉰은 어머니의 부탁으로 주안과 전통혼례를 치루지만 주안은 적적한 어머니의 가족이되었을 뿐이었다. 후에 루쉰은 뜻을 함께 하게 된 젊은 여인 쉬광핑을 만나게 되고 정식으로 함께 살게 된다. 그리고 1929년 상하이에서 아들 하이잉이 태어난다. 루쉰은 아이가 어른이 되면 이름을 바꾸라며 상하이의 아이라는 뜻의 '하이잉(海嬰)'이라 이름붙여준다. 아이는 자라서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을 바꾸지 않은 모양이다.

 

 

 

*그림전기니 역시 그림이 빠질수 없지. 루쉰이 자신의 방에 앉아 글을 쓰거나 생각하는 그림들을 모아봤다. 그는 "생활이 지나치게 편안해지면, 일이 방해받게 된다"는 생각으로 방을 아주 단순하게 꾸몄는데, 나는 그의 방에 있는 대나무로 만든 것 같은 의자나 책꽂이들이 탐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