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 방/공책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과 나카무라 요시후미의 <내마음의 건축 上·下>

 잔잔 2016. 5. 19. 14:06

 

 

tvn에서 방영중인 노작가의 <디어마이프렌즈>를 재밌게 보고 있다. 아직 두번밖에 안했지만. 주로 주변부 인물로 등장했던 노년기의 인물들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어 꼰대들의 이야기, 황혼찬가, 시니어벤져스 등의 수식어가 붙어있다. 내 삶에서도 관심있는 주제이기에 흥미롭다. 드라마를 보다 문득 작년에 읽고 메모해둔 두 작가와 책이 떠올랐다. 분야는 다르지만 두 분을 읽고 나도 이렇게 자신의 삶을 만들어 온 것들을 그려보며 맺음하는 노년기를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더란다.

 

 

먼저 첫번째는 오에 겐자부로(1935~)의 <읽는 인간>이다. 이 책의 부제는 이렇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저도 그런 시기가 코 앞으로 다가온 노작가입니다. 게다가 저처럼 독서가 인생의 절반을 차지하는 인간은, 제가 읽어온 책에게도 마음을 다해 "안녕"이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제 인생의 책'이라 할 만한 이런 저런 책들과 이별하는, 그러면서 가능하면 여러분께 그 책을 건네드리는 그런 의식을 치러보고자 합니다.(9p)"

 

책을 쓰는 건, 그 책을 읽을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자신의 안에서 넘치는 이야기와 문장들을 기록하는 일과 다르게 책을 출판한다는 것은 말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오에 겐자부로가 쓴 <읽는 인간>의 출판 이유는 다분히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 작품들은 읽어본 적 없지만 앞서 부제에서 설명하듯 오에 겐자부로는 9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대작가다. 반년동안 한시적으로 열린 '오에 겐자부로 서점'이라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작가가 직접 고른 책들을 진열해서 판매하는 서점인 것이다. 평생 읽어온 수많은 책들의 네트워크를 엿볼 수 있는 서점이었을 게다. <읽는 인간>은 그 서점의 고농축 에센스같은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오에 겐자부로가 만난 인생의 책들을 잘 엮어 우리에게 건넨다. 헌데 또 단순히 책소개라는 느낌보다 작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첫번째 책에서 시작해 그것들이 이어지는 책들의 지도같은 게 펼쳐진다. 그래서 더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다.

 

"이런식으로 자신의 가장 처음 책들을 발견했다면, 그것들을 하나로 이어 기틀이 되는 평면을 만듭니다. 그 뒤에는 이 책들이 불러들이는 다른 책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죠. '이 책이 불러들이는 사람을 기다린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33)" *<프랑스 르네상스 단장> 와타나베 가즈오 > 포, 오든, 엘리엇

 

또 책을 읽는 그만의 방법(번역서의 경우 원서와 대조하여 문장을 읽어나가는 것, 한 작가의 작품과 해설, 연구서등을 3년동안 읽는 것 등)과 그가 소설을 써내려가는 과정이라든가 중요시하는 부분, 방식 등도 엿볼 수 있다.

 

*엘리엇의 <네 개의 사중주>에서, 저는, 시인이 '무엇을' 이야기하느냐보다 '누구에게' 이야기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16).

 

*지금도 저는 소설을 쓸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 사람의 이동을 리드미컬하게 제대로 다루는 문장을 만드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엘리엇의 시처럼, 해질무렵 노란 안개가 마치 고양이가 등이나 콧등을 비벼대며 거리를 걸어가듯 번져나간다는 표현 같은 거죠. 화자가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을 그의 내면과 함께 제대로 그려낼 문장을 찾고 싶다고, 단순하긴 하지만 저는 쭉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30-31).

 

그리고 그가 소개한 사람들 중에선 에드워드 사이드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검색하면, 팔레스타인출신의 미국영문학자, 비교문학자, 문학평론가, 문명비판론자 등이라고 소개된다. 언제나 남겨지는 것들에 흥미를 가져왔다고 말한 그의<후기스타일에 대하여 on last style>이라는 노년기 예술가들의 작업에 관한 책을 읽어보고 싶다.

 

 

 

두번째는 나카무라 요시후미(1948~) <내 마음의 건축上·下>이다.

 

 

 

나카무라 요시후미는 일본의 주택 전문 건축가이다.  20세기 건축거장들이 지은 집을 순례한 이야기를 담은 <집을, 순례하다>와 자신의 집짓기 철학과 방식을 담은 <집을, 짓다> 등 건축, 특히 주택 건축에 관한 저서를 많이 쓰셨다. <내 마음의 건축>은 상하두권으로 나뉘어져 있고 부제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공간들이 손짓하며 부른다'. 이 시리즈는 나카무라 요시후미가 마음 속에 담은 건축물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유명한 건축물도 있고 또 보다 덜 알려진 건축물도 있고 또 건축물이라고 하기엔 좀 머시기한 그런 공간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나카무라 요시후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공간들이 소개되고 있다는 것. 건축가로 살아오며 만나왔던 공간들 중에서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곳들을 소개하는 것이기에 읽는 이에게도 그 공간을 마주했을 때의 설렘이라든가 놀라움들이 전해진다.

 

*무라노 씨는 '만물의 사소한 부분, 사물의 끊어진 단면'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의 말을 자주 했고, 서로 다른 소재 사이의 경계와 접점을 대단히 신중하게 그리고 소중하게 다루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진수를 바로 치요다생명본사빌딩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上,20).

 

*저를 매료시킨 것은 가족들을 위한 선명한 동선처리와 편리하고 안락한 공간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알기 쉬운 평명계획입니다. CSH#11(줄리어스 랠프 데이비슨의 case study house 중 하나의 집. 1945년 새로운 주거방식을 고민하며 진행된 실험주책프로젝트의 하나다) 의 동선처리와 흠잡을 데 없는 공간구성은 핵가족을 위한 작은주택이 궁긍적으로 도달한 '모던 리빙의 프로토타입(원형)'이라 불러도 좋다고 생각합니다(上, 147).

 

 

 

*분석하거나 해석하거나 이해할 필요없이, 단지 그 건축에 온몸을 담그는 것만으로 마음이 충족되고 고무되며 힘이 솟아나게 하는, 효능 좋은 온천과도 같은 건축. 카스텔베키오 미술관은 제게 그런 건축물입니다. 그렇지만 꼭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뜬금없이 그곳에 가고 싶어져 곤란할 때가 있으니 말입니다(下, 41).

 

*중요한 것은 '설계되지 않은 듯 자연스럽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적한 곤씨의 말입니다. 하타노다이 역의 계단통이 가진 매력도 결국 이 말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저래 어찌어찌 만들어가다보니 어느순간 완성되어버린 공간이 바로 하타노다이의 계단통입니다. 설계한 사람이나 시공업자가 하타노다이 역을 만들면서 '건축적인 작품을 만들자, 이 공간으로 사람을 감동시켜보자'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에도 걸림없는 듯 자연스러운 매력은 이러한 '무심無心'덕분입니다. 더불의 '무심'의 옆자리에 '선의善意'라는 단어도 붙여두고 싶습니다(下, 141-142).

 

 

 

어떻게 살고 싶은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가. 어떻게 늙고 싶은가. 비슷한 맥락의 질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종종 이렇게 멋진 어르신들을 만나면 생각한다. 우아 멋지다, 부럽다. 학교다닐때 그러니까 10대때 나는 오히려 굉장히 자신있었다. 꿈도 분명했고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지, 앞으로의 내 인생에 확신이 있었다. 오로지 내가 듣고 보고 읽는 것들 그리고 내 안에서 튀어나오는 것들만 붙잡고 앞만보고 달려갔다. 그런 나를 부러워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대체 어디서 그런 확신이, 자신감이 튀어나왔는지 가늠도 못하겠다. 어쩌면 두려운 게 많아진 약한 어른이 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나는 지금 잘 모르겠다. 대체 어떻게, 무엇을 해야할지. 왜이렇게 자꾸 뭔가 주저하게 되는 건지. 자주 고민하는 건지.

 

전에 친구들과 극단을 만들어 연극을 할 때 옆에서 지도해주신 감독님께서 마지막 공연을 한 뒤에 이제 그만하려고 한다는 내게 물으셨다. 왜? 나는 답했다. 제가 하고 싶은 건 연극이 아니니까요. 그랬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뭘 하든 똑같아 임마. 나는 그때 그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뭘하든 똑같지. 그게 말이야 방구야. 그런데 지금은 왠지 그말을 알 것 같다. 무엇을 하든 똑같다는 그 말의 맥락을 조금은 짚어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하지만 그러니까 더욱 더 뭘 해야할지 모르겠다, 가 되버렸다.

 

새롭게 다시 뭐든 시작해볼 수 있는 시간이 내게 다시 돌아왔다. 헌데 열여덞이 아닌 스물여덟의 나는 뭘 해야할지 딱 정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일단 2016년은 흘러가는대로 두고 있다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