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 방/공책

<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강의>

 잔잔 2015. 1. 14. 21:51

작년에 남경태선생님의 <종횡무진 동양사>를 재밌게 읽고 중국사를 다시 읽어보려고 도서관에 갔다가 찾아온 책. 예전에는 잘몰랐는데 요즘엔 역사책이 참 재밌다. 특별히 중국사는 고대신화부터 현대사까지 관심을 가지고 보려고 한다. 한문공부를 계속해보고 싶어서. 그래서 이 책의 자매편인 <중국현대사 강의>도 빌려와 보고 있다. 이 책이 소소하게 재밌는 부분이 하나 있다. 인물이나 지명을 중국식발음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익숙한 공자대신 쿵쯔라고 쓰여있는데 괜시리 공자가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발음이랄까, 피식하면서 웃음도 나고.

 

검색하다 보게 된 글 한 토막

조관희 교장선생님은 현재 상명대 중국어문학과 교수입니다. 전공이 중국의 고대소설 연구이지만(한국중국소설학회 회장 역임), 오히려 중국 여행 전문가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 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2001년부터인데, 그 동안 하이난다오(海南島)를 제외한 중국의 전 성(省)을 모두 돌아보았습니다.

그 동안 중국을 돌면서 찍은 사진만 약 10만 장이 넘는데, 이 가운데 4만 장 정도가 베이징에 관한 것일 정도로 베이징에 대해 집중적인 연구를 했습니다. 이에 2008년에는 베이징올림픽에 맞추어 <세계의 수도 베이징>(창비)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이곳저곳을 두루 돌아다니기도 하지만, 중요한 곳은 한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여행객이 아닌 현지 주민의 느낌으로 해당 지역의 장소감(sense of place)을 체화하여 그것을 책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오랫동안 해오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중국 역사를 좀 더 대중들에게 쉽고 친근하게 전달하기 위한 작업들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의 책이 너무 난삽하고 전문적이라 대중들이 읽고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5천 년이 넘는 중국 역사를 쉽게 한 권으로 요약한 <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강의> <조관희 교수의 중국 현대사 강의>(궁리) 연작을 펴냈습니다. 그리고 전공을 살려 중국 소설과 중국 역사를 적절히 연결시킨 <소설로 읽는 중국사1, 2>(돌베개)를 펴내 독자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중국을 이해하는 8대 키워드> 프레시안인문학습원 알림 2014.07.11 17:09:28

 

지역의 장소감을 체화하는 여행, 좋다. 소설로 읽는 중국사1,2도 읽어봐야겠다!

 

 

 

 

*참고로 '공책'카테고리는 읽은 책들을 발췌하며 단편적인 생각이나 느낌을 메모해두는 곳이다.

 

 

 

 1 말

 

<춘추>는 일견 객관적인 사실을 담담하게 서술한 듯 보이지만,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담아내고 있으니, 이것을 '말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큰 뜻을 담고 있는 것 微言大義'이라 한다. 아울러 '사냥狩' 이나 '진나라 사람秦人'과 같이 글자 하나로 시비是非와 포폄褒貶의 뜻을 표현하고 있으니. 이것을 일러 '한 글자로 칭찬과 비판을 동시에 하는 것 一字褒貶'이라 한다. 이 '미언대의微言大義'와 '일자포폄一字褒貶'은 흔히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 하여 후대의 역사가들의 글쓰기 전범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20

 

 

>일자포폄. 한 글자로 칭찬과 비판을 동시에 하는 것. 언어가 가지는 특징중 하나라고 볼수 있겠지만 한자의 경우는 좀 더 특별하게(다른 표의문자들도 그럴 수 있겠다) 글자 하나에도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내가 한자를 좋아하게 된 이유 역시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 평소에 자주 쓰지 않는 말들이랄까. 맥락상 대충 이해는 되지만 처음 본 단어들이었다. 

-급전직하하다: 갑자기 바뀌어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진행되다

-발호: 권세나 세력따위를 함부로 휘둘러 날뜀 

-일떠서다: 북한말, 힘차게 일어나다

-땅띔: 평양사투리, 알아내다, 어림짐작하다

 

 

 

2 생각해볼 거리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앞서의 장에서 '왕도'정치와 '패도'정치에 대해 말한 바와 같이 중국은 명목상 내세우는 것과 실제로 시행하는 것 사이에는 항상 괴리가 있고, 이러한 양면성을 절묘하게 조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중국인들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사실이다. 곧 겉으로 지향하는 것은 인의仁義에 입각한 백성들의 교화를 중시한 왕도王道정치인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권모술수와 토사구팽식의 냉엄한 현실 논리에 바탕한 패도覇道정치로 나라를 통치해나갔다는 것이다. 138-139

 

 

 

>중국인들 고유의 특성이라는 이야기. 지리가 생물에게 주는 영향은 어마어마하다고 생각한다. 신기하기도 하고. 내게도 한국인의 특성이 있겠지. 그런 저 부분은 인간존재의 특성에도 해당하는 얘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괴리, 양면성을 절묘하게 조화시키는 것.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저자도 부정적인 측면만을 부각시켜 말씀하신것 같진 않다.

 

 

이와같은 생각을 요약해 보여주는 것이 '중국의 학문을 본체로 삼고 서양의 학문은 실용적인 측면에서 활용한다 中學爲體 西學爲用'는 이른바 '중체서용中體西用'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비슷한 처지에 놓였던 조선의 경우 '동도서기東道西器'로, 그리고 일본의 경우는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말로 변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 양자가 구분될 수 있겠는가? 정신의 혁명 없이 외형적인 결과물만 추종하는 것은 근본적인 변화의 동력이 될수없다는 측면에서 볼때, 중체서용을 철학적 기반으로 한 양무운동은 애당초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 한계를 갖고 출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83

 

사실상 당시 중국이 위기에 빠진것은 전근대 사회의 무능과 부정부패, 비효율, 그리고 무엇보다 합리성의 결여, 학문의 후진성 때문이었는데, 이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은 손을 놓은 채 단순히 서구 열강에 비해 무력이 뒤진다는 이유로 군사분야에 한정해 자강운동을 전개해나갔던 것이다. 384

 

 

> '시대적 한계'라는 말로 이전의 역사를 너무 지금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게 아닐까..

 

 

 

 

3 더 궁금한 인물들

 

한 무제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흉노와의 일전을 대비하는 중 전투에서 사로잡힌 흉노의 병사로부터 솔깃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이전에 흉노의 공격을 받았던 대월지국이 서쪽으로 천도한 뒤 흉노에 대해 보복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무제는 대우러지국과 연합해 흉노를 협공할 생각을 갖고 대월지국에 사신으로 보낼 인물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도 자원하지 않은 가운데, 한중漢中출신으로 낭중벼슬을 하던 장쳰(張弿장건)이 홀로 나섰다. 호인 출신 통역인 간푸와 종자 100여명을 이끌고 길을 떠난 장쳰은 흉노 땅으로 넘어가자마자 흉노에 사로잡혔다. 장쳰을 유능한 인재로 보아 이용하려던 선우는 장쳰을 억류하고 흉노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 자식까지 낳고 살게 했다. 흉노 땅에서 10년을 살던 장쳰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몇 명의 종자와 함께 탈출해 서역의 대완국에 도착했다. 장쳰은 대완국 왕의 호의로 통역과 길 안내인을 대동하고 대월지국에 도착했으나, 대월지국은 새로 이주한 땅이 기후가 좋고 물산이 풍부해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어 한과 연합해 흉노에게 복수하려는 의지를 완전히 잃고 있었다. 그곳에서 다시 1년을 체류한 뒤 소득없이 귀국길에 오른 장쳰은 이번에는 파미르에서 타림분지의 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티베트 땅을 통과하는 길을 택했으나 다시 흉노에게 잡혀 1년 남짓 억류되어 있다가 흉노의 내분을 틈타 다시 탈출해 창안으로 돌아왔다. 결과적으로 장쳰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잘알려져 있듯이 이때부터 서역으로의 교통로가 개척되어 흔히 말하는 '실크로드絲绸之路'가 열리게 되었다. 140-141 

 

 

당나라 우쩌텐(무측천, 측천무후)의 무자비無字碑(글자가 없는 비석을 일러 백비, 무자비, 몰자비라고 한다. 비석에 글자를 새기지 않는 이유는 다양하다)  196

 

 

명나라 영락제는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로 엄청난 양의 업무를 스스로 소화하며 관리들을 다잡고 재해 복구 등 백성들의 복리 향상에 힘을 쓰고 내정을 튼실하게 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거두기도 했다. 환관문제만 해도 그들이 멋대로 발호하는 일은 영락제 치세에는 있을 수 없는 일로 영락제는 환관들을 능력에 따라 적재적소에 배치해 활용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환관출신으로 대선단을 이끌고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항해를 수행했던 정허(鄭和정화 1371-1433?)이다.

명태조 주위안장은 외국과의 사무역을 금지하고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구가 사이의 조공 관계로만 한정했다. 하지만 영락제는 이를 중국 동남부해안으로부터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로 확대하고자 정허에게 항해를 떠나도록 명했다. 정허의 첫 번째 항해는 1405년에 이루어졌으며 영락제 재위 기간 동안은 모두 6회, 그리고 마지막 항해는 선덕제때로, 1405년에 시작해 1433년까지 28년동안 모두 7회에 걸쳐 진했되었다.  (...)

정허가 여행한 곳은 말래카 해협을 거쳐 인도네시아의 자바와 수마트라, 태국을 지나 스리랑카까지 이르렀으며, 일부는 아라비아 반도의 아덴까지 도달했고 일설에 따르면 아프리카 동부 해안까지 이르렀다고도 한다. 이것은 최초로 세계 일주에 나섰던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 가마보다 반세기 이상 앞선것이었다. 다시 이 같은 대원정이 가능했던 것은 세계제국인 원이 축적해놓은 여러 나라에 대한 정보와 그에 바탕한 지도가 있었고, 원대에 활동했던 이슬람 상인들의 항해술 때문이었다고 한다.  278-279

 

 

한때 죽음도 불사하지 않는 견결함으로 상소문을 올리던 캉유웨이였지만, 이제 그는 시간의 흐름에 속절없이 늙어버린 노추老醜한 정객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이상주의는 점차 현실에서 벗어나 망상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정치 집회에서 모든 참가자들이 성 구분이 없는 옷을 입음으로써 성차별을 없애자고 제안했으며, 현행 결혼 제도를 계약제로 바꾸어 매년 쌍방이 계약을 갱신할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했는데, "그러한 결혼 계약은 두 남성 또는 두 여성 사이에서도 가능하도록(조너선 D.스펜스 <현대중국을 찾아서1 308>)" 하는 것이었다.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