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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설 '마인드' 11장 자아 정리(발췌)

쌩쌩 2021. 12. 11. 17:00

 

 

 

 

 

제11장 자아(self)

 

1. 자아(self)의 존재와 인간적 동일성 문제

 

데카르트는 이 문제를 정식으로 다룬 적이 없으나, 일반적으로 추종자들은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이 문제에 대해서 자동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생각해 왔다. 자아는 바로 심적 실체와 같으며, 심적 실체의 동일성은 그것이 똑같은 심적 실체라는 사실로 간단하게 보장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해결은 독단적인 해결책에 불과하다. 흄은 자아와 인격적 동일성에 대한 데카르트 방식의 설명에 통렬한 비판을 퍼부었다.(47p)

 

자아란 정확히 무엇인가? 사람에 관한 어떤 특별한 사실이 평생 동안 여러 변화를 겪는 그 사람을 계속 동일한 사람으로 만드는가? 아주 최근에 필자를 포함 한 당대의 많은 현대 철학자들은 흄이 이 문제에 대해서 결정적 답변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경험의 계기 그리고 경험이 일어나는 장소로서 신체가 있을 뿐 그 외에 자아 같은 것은 없다는 주장이다. 우리가 관심을 내면으로 돌려서 본질적인 나를 구성하는 어떤 실체를 발견하고자 한다면, 내가 발견하는 것은 개별적 경험들이 전부라고 흄은 지적했다. 이러한 경험 외에 자아 같은 것은 없다는 대답이다. 흄에 따르면 우리의 삶에서 계속 변화를 겪으면서도 변하지 않는 내 자신이라고 스스로 귀속시키는 동일성이란 완전히 가공의 동일성이다. 일종의 체계적 착각이라는 것이다.(47p)

 

하지만 정상적인 의식 경험에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어떤 감각, 즉 자아로서 내 자신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정상적인 의식 경험의 전형적 특징이다.(160p) 즉, 우리는 우리 각자가 스스로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이러한 1인칭 경험들이 우리의 동일성에 본질적이며, 3인칭 현상은 이차적이라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삼사처럼 우리의 물리적인 겉모습은 완전히 바뀔 수 도 있겠지만, 다른 육체로 변신하기 전과 같은 사람이라는 점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느낀다.

 

우리는 인간적 동일성 개념을 현실에 적용하는 데에는 통상 별 문제가 없다. 1인칭 기준과 3인칭 기준이 합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두 기준이 근본적으로 갈라지지는 않는다.

 

(1) 인간적 동일성의 기준

 

지금의 그 사람과 과거의 그 사람이 동일 인물인지 결정한다고 하자. 그럴 경우 우리가 일상 대화에서 사용하는 기준을 보면, 거기에는 인간적 동일성의 개념을 구성하는 적어도 4개의 기준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 중 둘은 3인칭 관점, 하나는 1인칭 관점, 나머지 하나는 두 관점이 섞여 있는 것이다.

 

① 기억

 

인간적 동일성의 기준으로 이 기억 능력이 필요한 이유는 아침에 일어나 보니 다른 사람의 신체로 바뀌어 있는 사례를 상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나 자신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리 변신을 해도 여전히 그것이 나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지금까지 내가 가졌던 의식 상태들의 연속적 계기의 일부로서 지금의 상황을 계속 경험하고 있다. 여기에는 과거의 의식 상태들에 대한 기억 경험이 포함되어 있다. 로크는 이것이 인간적 동일성의 본질적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홉스와 흄은 기억과 기억은 매끈하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이런 주장을 논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늙은 장군은 청년 장교 시절에 일어났던 사건을 기억할 수 있고, 청년 장교는 어린 시절에 일어났던 사건을 기억할 수 있겠지만, 늙은 장군은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적을 본다면 그들이 틀림없이 옳지만, 사람이 무엇인가 망각했다는 사실은 1인칭 관점에서 제기되는 주장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 같지는 않다.

 

② 동일성과 기억

 

로크의 설명에 맞서는 판에 박힌 반론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 반론이 결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설명은 순환론적이다. T2 시점에서 P2라는 사람은 T1 시점에서 P1이라는 과거의 사람과 동일하다. 단, T2 시점에서 P2가 T1 시점에서 P1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기억하는 경우에만 그렇다. 이런 주장이 순환론적이라는 것은 이렇게 증명된다. T2 시점에서의 P2가 T1 시점에서의 P1에게 일어난 사건을 기억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기억하기 위해서는 P2가 P1과 동일한 사람이어야 한다. 만일 이 논리가 참이라면, 우리는 동일성의 주장 혹은 동일성의 기준을 정당화하는데 기억을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기억이 인간적 동일성의 본질적 부분이라는 이론이 대답하고자 하는 질문은 1인칭 질문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 관한 그 무엇이, 내 개인적 경험에 관한 그 무엇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나 자신을 연속적인 실체로 감각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답이 되려면, 스스로를 연속적인 자아로 감각하도록 만드는 본질적 부분을 내 기억 경험의 연속성에 두어야 할 것 같다.

 

 

 

 

 

2. 비인간적 자아의 존재

 

지각, 행위, 반성 등을 구성하는 심리적 사건들의 계기 그리고 이러한 심리학적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로서의 신체, 즉 신체와 그 심리적 사건들의 계기 외에 무엇인가 다른 것을 상정해야만 하는가? 곧 나의 실제 감각과 사유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일어나는 신체 외에 이 모든 사건들의 주체인 어떤 것, 어떤 실체, “나”를 상정할 필요가 있는가?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우리의 실제 경험들의 계기를 넘어서는 자아 혹은 인간적 동일성 같은 것은 없다고 로크와 데카르트를 비판한 흄의 논리에 동의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자아에 대한 흄의 회의론은 필연적 연결과 인과에 대한 회의론과 비슷하다. 그는 내 관심을 내면으로 돌리면 특정한 경험들을 발견한 뿐이지 자아의 경험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필자와 마찬가지로 흄의 논변이 가지고 있는 설득력에 동의한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필자는 흄이 빠뜨려 놓은 결론에 싫더라도 도달해야 한다. 우리는 경험들의 계기 외에 자아를 절대적으로 상정해야만 한다. 인간은 경험들의 계기와 신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우리의 최초의 가정으로 돌아가자. 이 경험의 계기에는 커피 맛, 빨간색의 광경 등등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뭔가 빠진 것이 있을까?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질서한 경험들을 가지지 않는다. 우리가 가지는 경험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의 통합된 의식장의 일부로서 경험된다. 또한 그 의식장의 소유자는 시간의 경과 속에서 그와 같은 의식장의 연속성을 자기 경험의 연속으로 경험한다.

 

최소한 자아의 형식적 경험을 상정할 필요가 있다고 필자를 확신시킨 논변은 합리성, 자유선택, 의사 결정, 행위 이유 등의 개념과 관계가 있다.

 

1. 나는 부시에게 투표하고 싶었기 때문에 투표용지에 X표를 했다.

2. 부시에게 투표하고 싶었기 때문에 위장병이 났다.

 

논의의 목적상 이 둘은 모두 참이며, 모두 적합한 설명이라고 상상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둘의 논리적 형식은 전혀 다르다. 표준적 해석에서 보면 2번은 인과적 충분조건을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표준적 해석에서 보면 1번은 인과적 충분조건을 진술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바로 그 이유에서 투표용지에 있는 부시의 이름에 X표를 했다.

 

이유의 측면에서 내 행위의 설명은 인과적 충분조건을 제시하지 않는데도 어떻게 적합한 설명이 될 수 있는가? 그 설명은 내 관점에서는 완벽하게 적절하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행위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나의 자유로운 자발적 행위를 설명하려는 언명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나는 자유롭게 행위 할 수 있고 그 행위에 책임을 질 수 있는 합리적 자아 혹은 행위 주체를 상정해야 하는 것이 그 대답이라고 믿는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유롭고 합리적인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X라는 단일 실체가 존재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흄은 내가 제시한 이런 모든 가정에 이미 결정적 반론을 제시했다고 생각했다. 이 자아, 이 X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다. 나는 흄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자아라는 실체의 경험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러한 실체 혹은 형식적 원칙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 칸트의 통각과 설의 비인간적 자아 사이에서, 칸트는 통각을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보았다면 설의 입장에서의 비인간적 자아는 많은 것을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도구로서 여겨진다.

 

*인간은 다중인격자라고 한다. 단지 그것을 거부하는 관념적 주장들이 현대사회에서 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너 자신이 되어라. 자아실현을 하여라. 너의 개성을 맘껏 드러내라.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즉, 인간은 무엇이든 될 수 있음에도 적성을 찾고 그 안에 몰아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