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15일
한달후면 이음이 태어난다. 사실은 한달도 안 남았다. 책에서, 인터넷에서, 여기저기서 보고 들은 것들 가지고 이음맞을 최소한의 준비를 했다. 천기저귀24장과 기저귀커버5장, 배냇저고리 4벌과 손싸개 하나, 가제손수건 30장, 포대기하나를 샀다. 그리고 욕조와 속싸개, 방수요, 내복과 모자, 양말 등을 선물받았다. 모유수유를 자신하며 젖병은 구입하지 않았다. 혹 나중에 필요한 게 더 있다면 그때그때 사리라, 맘먹었다. 어떤 건 삶고, 어떤 건 손으로 빡빡 문질러 빨아서 볕에 널어 말려 착착 개어 수건을 깔아놓은 서랍장에 넣어 두었다. 예정일 2주전쯤부턴 가방하나에 필요한 것들 담아두고 조산원에 갈 준비를 해둬야지.
출산을 준비하면서 산통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접했다. 콧구멍에서 수박이 나오는 것 같다는 둥, 커다란 트럭 몇대가 온몸을 지나는 것 같다는 둥, 표현못할 고통이여서 조금만 지나면 몸이 기억을 못하게 해서 둘째를 또 나을 수 있다는 둥, 많은 얘길 들었다. 들을 땐 무섭지만 아직 감이 안와서 그러는지 금새 잊어버리고 만다. 출산과 육아에 대한 경제적 부담도, 아직 모르겠다. 물론 부자는 아니지만, 돈때문에 힘들어할 것 같지는 않다. 지금까지 그리 살아왔던 것처럼 없으면 없는대로 살 방법을 찾아낼 자신이 있다. 그 유명한 노랫말처럼 새파랗게 젊다,는 한 밑천을 가진 배짱인가, 아무튼.
임신, 출산, 육아와 관련해 처음부터 내가 가장 두려워 했던 것은, 내가 없어지는 것만 같음이었다. 휴학후부터 작년까지 내가 하던 것이라곤 이리저리 떠돌며 사람들을 만나고, 배우고, 상처주고, 아파하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한 일들 뿐이었지만 ,마치 이젠 중요한 일을 더이상 못하게 된 것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몸도 마음도 무거워져버렸다. 물론 임신기간 동안 늘 그랬던 건 아니다. 이음의 움직임에 기뻐하고, 쌩쌩과의 시간과 앞으로의 그림 그리기, 맛있는 걸 만들어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왠지모를 외로움같은 게 같이 자라났다. 잘있다가 혼자 지하철을 타서 노약자석에 앉으면 이상하게 느껴지는 외로움처럼 말이다. 이건 딴얘기지만 노약자석을 없앤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그런 외로움이 자라나는 건 '나'라는 존재에 대한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며, 혹은 만들며 살아왔던 탓 일게다. 그러니 엄마가 된다는 커다랗고 급격한 물리적, 정신적 변화앞에서 허우적대고 있겠지. 그런데 이전까지 열심히 살아온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게 쉬운일이 아닌가 보다. 혼자있게 되면 또 그 집착이 외로움으로, 운명에 대한 미움으로 번지는 날들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 시간들을 나는 이음과 함께 보냈다.
오늘 탁틴맘에서 엄마를 위한 인문강좌를 들었다. <두려움없이 엄마되기>의 저자 신순화씨와 탁틴맘의 김복남소장님 얘기가 첫번째 강좌였다. 있는 그대로 자신과 아이, 사회를 이해하는 엄마되기,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쌩쌩이 선물받아와 책을 미리 읽어본 터라 신순화씨의 이야기 자체에 대한 기억보다는, 자기 직업을 엄마라고 소개했던 것과 강의가 끝나자마다 현대백화점 쉼터에 두고 온 두 아이들과 친정엄마를 찾아 뛰어가던 모습이 인상깊었다. 질문시간에 신순화씨에게, 그렇게 열렬히 엄마가 되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되나요? 라고 물을려다가 말았다. 그분에겐 '엄마'와 '나'는 구분되어지는 게 아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걸 따로 나누어 생각하는 내가 아직 참 어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이 떠오른 순간 멋대로 답도 떠올라버린 것이다.
아 그리고 또 있다. 고운맘카드와 예방접종에 관한 것. 이 부분에서도 역시 나의 좁은 생각을 넓혀주셨다. 고운맘카드는 임신확인서를 가져가면 병원에서만 하루 6만원 한도로 총 40만원을 쓸수있는 보건복지부의 바우처카드서비스다. 나도 그걸 작년 10월에 받았다. 처음부터 조산원에서 출산할 계획이었지만 그 카드는 조산원에서 쓸 수 없다는 말에 가까운 산부인과에서 산전검사과 정기적인 초음파검사를 받았다. 사실 병원에도 그리 자주갈 계획이 없었지만 어차피 거기서밖에 못쓴다는 생각에 한달에 한번씩 병원에 갔다. 그런데 올 4월부터는 50만원 한도로 바꼈고 조산원에서도 쓸수있다고 한다. 아무튼, 고운맘카드에 대한 불만이 있었지만 그 불만과 불편함에 대한 다음을 생각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신순화선생님께서는 병원에서만이 아니라, 가령 수유복을 산다든지 하며 자유롭게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며, 고운맘카드사용 확대를 위한 사회적 운동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예방접종은 우리가 모르는 의학계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이기기위한 공부와 운동이 필요하다고 하셨고. 며칠전에 보건소에서 철분제를 받아오면서 신생아 예방접종 안내서 같은 걸 받았다. 내가 어렸을 때보다 예방접종의 종류가 훨씬 많아진 것 같았다. 이걸 다 맞춰야 되나, 라는 생각에 깜깜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입학전에 예방접종 확인서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안 맞추자니 그게 또 그랬다. 암튼 그것들을 좀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솔직히 둘째, 셋째는 예방접종 맞추지 않았다는 선생님 얘기에 옳다구나, 했다. 대신 몸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같이 들었다.
그리고 김복남소장님 이야기중에선 첫아이와의 관계에서 배우는 것도, 또 서로 싸우게 되는 일도 많다는 얘기가 마음에 남았다. 미성숙한 엄마와 처음으로 부딪치는 아이다 보니 자기 모순을 참 많이 발견하게 된다며 미안한 부분도 많다고 하셨다. 그 얘기에서 가까운 미래의 내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이음이 태어나 조금만 자라면 금방 엄마의 모자란 부분들과 마주하게 될텐데,하는 생각이 들어서. 태어나서 당분간은 엄마를 의지하며 세상을 바라보게 될터인데, 엄마라는 작자가 좋은 엄마가 될 생각보다 자기 삶, 자기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면 어떨까.
힝, 어렵다.
근데 웃기게도 이렇게 두서없이 주저리주저리하다보니, 참 이상하게도 내가 가졌던 그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 같다. 대신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치만 두려운것보단 어려운게 더 괜찮은 것 같다. 두려운건 내 속에서의 문제고 어려운건 밖에서의 문제들 때문인데, 밖의 어려운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내 속이 건강하다면 어려운 것들쯤이야, 하하ㅏㅎ.
이제 한달 후면 나는 엄마가 된다. 사실 정확히 따지면 작년 가을부터 엄마가 됐지만 이제서야 이음을 만나면 진정 환하게 웃을 줄 아는 엄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못난 엄마다. 그치만 그래도 엄마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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