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 방/공책

시각디자인 _ 좋은 것에 담긴 감각과 생각 _ 리카르도 팔치넬리

 잔잔 2022. 6. 12. 21:23


최근에 읽은 디자인 관련 책중에서 제일 오랫동안 읽은 책이다. 시야를 확장시키는 있는 역사적 이야기와 사회경제문화적 맥락을 짚고가는 통찰들이 좋다. 좋은 것에 담긴 감각과 생각이라는 부제가 마음에 들었다. 모호한 경계, 책디자인, 스타일, 아이콘, 타입, 브랜드, 레이아웃, 내러티브, 화면, 설득, 설명….표시해둔 곳들을 공책에 옮기면서 다시 쓱 보는데도 역시 좋은 책이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책이다.



프롤로그. 디자인을 만드는 질문들


11. 인쇄기술이 점점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교회는 이와 함께 새로운 형태의 위험이 도래하리라는 것을, 불신자나 이단자보다도 훨씬 더 큰 위험이 인쇄기술 뒤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의 사건(1524년 판화가 마르칸토니오가 포르노 복사본 배포로 투옥됨)이 일어났던 시기에 유럽에서는 루터교의 전도지뿐만 아니라 교황을 안티그리스도로 그린 인쇄물들이 도처에 뿌려지고 있었다. 정말 위험한 것은 위험한 사상이 아니라 그것의 유포였다. 권력층이 후에 대중사회로 불리게 될 계층의 의견을 역사상 처음으로 우려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대중이란 수적으로만 우월할 것이 아니라 다수의 의견을 주도한다는 점에서 위험 요소를 안고 있었다. 죄는 포르노를 그렸다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을 대중에게 배포했다는 데 있었다.
미술이나 수공업과 전적으로 구별되는 디자인의 가장 독특한 특성 중에 하나는, 디자인의 예술적인 측면이 하나의 독창적인 작품이 아니라 그것의 복사본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디자인을 단순히 재생산의 필요성과만 결부시킬 이유는 없다. 결과적으로 디자인이 미적이고 기능적이고 감각적인 세계에서 그 가치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16. 뛰어난 예술성은 분명히 주목을 끌고 명성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누가 정말 훌륭한 디자이너인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평범한 티셔츠나 상표를 어떻게 만드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려면 먼저 깊이 있고 견고한 지식을 겸비한 기술자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 디자인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은 냉동식품 포장지, 지하철 시간표, 약국영수증, 만화, 수학책, 버스표, 전기요금 고지서, 여권의 활자체, 가구조립 설명서, 자몽 위에 붙은 상표스티커, 소설책의 한 페이지, 지도, 도로 표지판, 타일의 패턴, 햄에 불로 찍어 넣은 상표, 패션모델 사진, 셔츠 재단을 위한 밑그림, 과학공식, 미국대통령의 얼굴 등 이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전부 디자인에 속한다는 말인가? 물론 전부는 아니다. 다시 말하면 대중사회에 속하는 어떤 계열의 사람들에게 일련의 정보와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이들을 유혹할 목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지는 모든 것을 비주얼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17. 시각적인 요소는 항상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흐름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또 다른 종류의 언어와 항상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시대와 사회를 벗어나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시도는 사실상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비주얼디자인이라는 용어는 그래픽디자인이라는 용어와 동의어로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그래픽’은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상표나 페이지의 레이아웃, 레터링, 폰트 등의 시각화 시스템을 가리키고, ‘비주얼’은 시각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보다 일반적인 영역을 가리킨다.

18. 비주얼디자인 속에서는 형식이 기능을 따르지 않고 의도를 따른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디자인 문화라는 주제 이외에도 그와 관련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다시말해 우리는 대중사회 속에서 순환되는 신화와 스테레오타입과 공통의 관심사들을 관찰해야 한다. (…) 최고의 디자인 상품을 포함해서 디자인을 만드는 사람드이 꼭 디자이너만은 아니다. 때로는 수학자, 공학자, 혹은 철학자가 디자이너가 되기도 한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현대의 인포그래픽 시스템을 탄생시킨 아이소타입은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오토 노이라트가 만들었고 최첨단의 세계지도는 수학자들이 이루어낸 통계학의 성과였다.

19. 이 책에서 디자이너라는 용어는 우선적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될 것이다. 예를 들어 수학자나 금속공예가, 사진작가, 사업가처럼 디자인과는 전혀 상관없는 교육을 받고 상이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는 디자이너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1. 시각적 세계 / 모호하고 유동적인 세상의 디자인


30. 보드카 병은 하나의 상품인 동시에 그것의 비주얼디자인이다. 광고로 일종의 심리 게임을 벌일 수 있고 병을 직접 보여주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광고효과를 얻을 수 있ㄷ가. 앱솔루트는 상품과 그 비주얼이 절대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임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준다. 유사한 경우를 우리는 항상 비슷한 모양의 병을 사용하는 와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맥주나 물병도 마찬가지다). 와인용병은 프랑스인들의 발명품이지만 보급과 함꼐 하나의 카테고리로 성장했고 이제는 상징적인 이미지 혹은 일부가 전첼츨 상징하는 제유提喩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예로 나이키나 베네통이 상품들을 전혀 선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내보내는 광고를 들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비주얼 디자인이 정말 모든 것을 담당한다. 디자인이 삶의 방식과 생각하는 방식의 형태를 부여하며 그것을 통해 상품에 대한 소비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32. 앱솔루트나 이케아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단순히 우리가 눈으로 보아 왔던 무언가의 모습뿐만 아니라 우리 머릿속에 살아있는 어떤 종류의 시각적인 모델이다. 이제 좀 더 일반적인 정의를 내려 보자. 비주얼디자인이 구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표상’이다. 표상이란 우리의 눈앞에 감각적인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 속으로 들어와 사는 무언가를 가리킨다. 여러 상품들(문화적인 상품까지 포함해서)이 이런 메커니즘을 토대로 이끌어내는 매력적인 분위기는 샤넬, 라코스테, 에이나우디 같은 이름들이 심리적인 차원의 원형이 되고 어마어마한 부수적인 가치를 획득하도록 만드는 요인이다.


2. 산업 / 책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39. 우리의 이야기는 1400년대부터 시작한다. 1700년대에 일어난 산업혁명은 일찍이 구텐베르크(1398?~1468)가 문을 열었따고 보아야한다. 운동화나 저장식품 용기에 앞서 산업의 힘으로 생산된 최초의 상품, 즉 최초의 디자인 상품은 인쇄된 책이었다.

43. 예술과 산업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던 바우하우스도 활자 디자인에 대해서는 형식적으로 접근했다. 활자들의 모양새는 열심히 관찰했지만 이들이 글줄과 여백과 책의 실질적인 출판에 끼치는 영향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 따라서 디자인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기술과 지각의 문제뿐만 아니라 생산과정과 경제적인 문제를 동시에 고려해야만 한다.

46. 인쇄술의 초기 형태를 살펴보면 눈에 띄는 물건이 하나 있다. 고고학 역사상 가장 풀기 힘든 수수께끼 중에 하나로 남아 있는 파이스토스의 원반이 바로 그것이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 유물은 1908년 발굴되어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오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제작 연대는 기원전 17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원반은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시리즈나 산업 같은 개념들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흙으로 만든 이 원반의 양면에는 글자들이 나선형을 그리며 중심을 향해 모여 있다. 수직으로 글자들을 몇몇 기호 그룹으로(어쩌면 말로) 나누었고 총 242개의 기호들을 서로 다른 45종류의 펀치형 인장을 사용해서 새겨 넣었다. 그렇게 만든 이유 중에 인쇄와 연관된 것은 없어 보인다. 이런 식으로 일부러 판형을 미리 만들어서 압착시키는 방법은 어떤 시대 어떤 장소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단 하나의 판본을 가지기 위해 판형을 만든다는 것이 우리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뿐이다. 하지만 또 다른 목적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 현대인의 좁은 시야 때문일 것이다.


3. 시리즈 / 산업디자인이 사고하는 방식


54. ‘새로운’ 물건이 그 자체로 좋다는 생각은 고대인들에게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일본 전통문화 속에 등장하는 지저분한 요소들이 어떻게 서양인들에게 극단적인 매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물들 위에 낀 때가 오랜 세월을 상징하는 소중한 기호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예로 든 적이 있다. (…) 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단순히 모양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구입한 새 의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허영에 불과했다. 우리가 고대인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의자 하나를 구입하면서도 앉기 위해서만 구입하지 않는다는 점, 즉 우리가 문화를 소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56. 예술을 목적으로 단일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계획을 세워 본 사람이면 누구든지 작품을 완성했다는 느낌이 불분명하고 개인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작품을 끝없이 다듬게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위대한 예술가는 적절한 시기에 멈출 줄 아는 사람이라고 피카소가 말한 바 있다).


4. 디자인 / 디자인이 하는 일


66. 영어 단어인 디자인design은불어 단어 데생dessin에서, 그리고 데생은 이탈리아어 디제뇨disegno에서유래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저명한 인문학자 베네데토 바르키는 1500년대 중반에 ‘어떤 예술을 다른 것에 비해 더 훌륭한 예술로 간주해야하는가’라는 질문을 화가와 조각가들에게 던지면서 일종의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예술가들의 대답은 각양각색이었디만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의견을 같이 하는 듯이 보였다. 그림이나 조각에 앞서 디자인, 즉 스케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디자인은 모든 예술의 아버지였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서 서서히 디자인은 단순히 도형의 구도를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창조해 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에게 디자인은 일종의 생각의 도구였다. (…)
‘디자인’이라는 말의 가장 일반적이고 일차적인 의미는 현실 혹은 상상속의 사물을 그래픽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디자인은 또 프로젝트를 뜻하기도 하고 일련의 작업들이 가지는 대강의 구도를 가리키기도 한다. 바로 이 두 번째 의미로 전달된 것이 영어의 디자인design이다. 어쨌든 이것의 옳은 번역은 ‘프로젝트’ 혹은 ‘기획’일 것이다.


5. 재생산 / 반고흐와 마티스, 그리고 우편엽서의 시대


84. 구텐베르크와 뒤러 모두 금속공예가 출신이다(1400년대의 내로라하는 판화 전문가들은 대부분 화가나 세밀화가가 아닌 금속 공예가였다). 한 사람은 글을 인쇄하기 위한 시스템을 발전시켰고 또 한사람은 이미지의 인쇄술을 발전시켰다. 그때부터 역사는 바뀌기 시작했다.

88. 그래픽 시학의 선구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바우하우스의 주인공 라슬로 모호이너지(1895~1946)였다. 그는 인쇄와 영화사진 연구에 주력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어떻게 전통적 인쇄가 가지고 있떤 이론적인 한계와 실질적인 작업(나무와 납덩어리들로 조작되던)의 둔탁함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지 주목했던 인물이다. 모호이너지는 책과 화보가 미래에는 더 이상 판화 인쇄가 아닌 사진을 통해 인쇄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 언젠가는 철학책들까지도 미국잡지사들이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그래픽 기술로 만들어질 것이다. 모호이너지가 가지고 있던 생각은 여러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언어와 시각적인 요소의 새로운 조합이었다.

89. 모호이너지의 사고를 예언적으로만 보고 그의 아이디어들이 당시에 상당히 혁신적이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그가 창안한 타이포포토typophoto는 글과 사진의 합성을 가능하게 해 주는 새로운 인쇄술을 통해 전언을 목적으로 하는, 언어와 시각적인 요소의 조합이라는 아이디어를 실현했다(이것이 바로 오늘날 그래픽디자이너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일이다).

94. 그래픽디자이너라는 용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인물은 윌리엄 애디슨 뒤긴스(1880~1956)다. 그는 1922년에 책, 화보 등 인쇄를 통한 다양한 종류의 커뮤니케이션활동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래픽디자이너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언급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에서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2차세계대전이 종결된 후였다.

101. 엽서는 1870년 프로이센과 프랑스 간의 전쟁이 끝날 무렵에 탄생했다. 최전방에 투입된 젊은 군인들에게 한쪽 면만 인쇄되고 다른 한 쪽은 비어 있어서 가족들에게 인사말을 적을 수 있도록 만든 작은 크기의 인쇄물을 나눠 주면서 시작된 것이 엽서다.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대량’의 관점에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산업적으로 생산된 이미지를 가장 먼저 대량으로 보급했던 매개체는 여행광고가 아니라 전쟁에 투입된 병사들이 가족과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련된 엽서였다. 수백만 장의 작은 이미지들이 유럽 전체를 오가며 생존자들의 소식을 알렸다.



6. 소비 / 이탈리아에서 스시를 먹는다는 것


112. 문화 생산자가 되려면 무언가를 창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질적으로 생산이란 무엇인가? 특별히 엄격한 조건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몇 가지 가능한 선을 그어 볼 수 있다. 생산이 있기 위해서는 만들어진 물건의 보급이 보장되어야 한다(대상이 사는 작은 마을인지 지구 전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돈을 투자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 시간을 투자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물건은 생산자가 생산 활동을 통해 이윤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일정한 수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사회가 그것을 하나의 상품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7. 맥락 / 사물과 사람 사이


122. 현대사회에서 지속적인 집중력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우리의 시선은 항상 부정확하고 따라서 비주얼디자인은 일반 대중이 빈번히 산만한 상태에 빠져든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133. 예를 들어 우리가 순전히 실수로 얼굴을 태웠다고 해도, 기호는 말을 하기 마련이다. 걷는 방식,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하는 방식, 지금 입은 셔츠와 단어 선택을 통해 말을 하기 마련이다. (…) 닥치는 대로 아무옷이나 입는 것도 하나의 옷 입는 방식이다. 이는 아주 정확한 의미를, 즉 사회적인 관습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형식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소통을 할 수 없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어떤 식으로든 해석된다는 것을 모른척 할 수도 없다.

138. 누군가에게 영화에 대해 설명하는 일은 하나의 사회 활동인 동시에 작품의 의미를 확장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이 모든 흥정과 담론들이 다양한 단계에서 형성하는 것이 흔히 공동의 상상세계라고 부르는 것, 즉 커뮤니케이션의 맥락이다. 문화는 개념이나 해석의 합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문화의 의미는 예외적으로 예술작품 속에만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와 보급을 통해 생산된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미지들이 모두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대단위 특정 그룹에게만 이야기한다는 사실이다.


8. 정체성 / 만든다는 것의 가치


148. 스탕달과 플로베르의 주인공들은 주변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자기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한 인물들이다. 이런 종류의 딜레마는 현대사회를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다른 시대, 다른 경제체제에서는 정체성보다는 실질적인 행동이 더 중요했다. 중세에 기사나 왕 혹은 농부는 사회 안에서 하나의 역할을 가지고 있었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 정확한 역할은 다른 사람 앞에 설 때 입는 옷과 비슷했지만 동시에 사회적 관행과 내면의 분리라는 현상을 가져왔다. 그런식으로 일탈된 부분은 영혼과 일치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만큼 고해성사 혹은 회개를 통해 사람들은 이미 저지른 행위의 무게를 영혼으로부터 떨쳐 버릴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1800년대 들어와서 상황은 바뀐다. (…) 산업화로 인한 농민들의 도시 진출, 대중의 문맹률 저하, 중앙정부 체제의 탆생, 호구조사 제도와 관리기관(학교, 병원, 감옥)의 발달, 사회적 관행의 정당화를 위한 과학의 활용, 광고의 탄생 등이 그것이다. 이런 제도들은 전부 ‘역할’대신에 ‘정체성’을 필요로 한다.

149. 사회체제가 한번 정립되면 마케팅은 쉽게 발전한다. 왜냐하면 정체성이 하나의 개인적인 현실로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모든 커뮤니케이션의 기초를 이룬다. 먼저 지역적 정체성이 있고(중세에는 와인이나 햄의 원산지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라별 정체성(메이드인 이탤리, 프랑스 요리), 기업별 정체성(나이키, 구글), 글로벌 정체성(마더테레사, 스티브 잡스)등이 있다. 그리고 인터넷의 비물질성이라는 것이 있다. 인터넷상에서는 (최상의 보상으로서) 대체 정체성, 즉 일종의 아바타를 취득하는 것이 가능하다.

151.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위험한 것은 정체성이 행동이나 존재를 기초로 하는 무엇이 아니라 소비를 기초로 하는 무언가로 변신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읽는 책, 가지고 다니는 휴대전화, 도덕적 관념, 입고 다니는 청바지 등은 단순히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표적이 된다.

152. 과학은 정체성이 우연에 기초하는 사회적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규명하기 위해, 정체성이 신의 가장 간한 뜻에 의해 결정된 분명한 진실, 즉 DNA에 기초한다는 것을 규명하기 위해 활용된다. 하지만 좀 더 깨어 있는 학자들은 과학이 세상에 대한 하나의 관점과 하나의 패러다임을 넘어서 나면 진실도 거짓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157. 마케팅은 국과와 법이 이미 창안한 모델을 재사용할 뿐이다. 기차역과 동사무소 밖에 설치된 자동증명사진 촬영기들을 떠올려보자. 이 기계들은 밝은 색상으로 칠해져 있고 우리를 향해 환하게 웃는 모습의 사진들로 도배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흔히 놀이공원에 있는, 안으로 들어가서 게임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게임박스처럼 생겼지만 이 기계들은 대신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도록 만들어졌따. 오락용 기계처럼 보이는 재미난 분위기는 이러한 기술이 처음에는 범죄자들의 목록을 작성하기 위해 개발되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증명사진이란 단지 옛날에 범인 식별용 얼굴사진이었던 것의 현대식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159. 독자들에게 냉소주의를 제시하려는 의도는 없다. 단지 우리의 자아가 가지고 있는 가장 순결하고 고귀한 측면들 역시 사회와 경제의 정확한 메커니즘 내부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모른 척할수 없다는 것뿐이다. 한 아이에게 무슨색을 가장 좋아하냐고 묻는 것은 곧 아이에게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소비자로서의 정체성 역시 표현하도록 가르치는 일이다.

160. 아마도 탈출구는 소비와 존재 사이의 실랑이에서 벗어나, 만든다는 것의 가치를 배우는 길일 것이다. 여권과 건강보헙 증명서는 비주얼디자인의 가장 강렬한 형태들 중 하나다. 비록 아무도 생각해 본 적은 없겠지만 누군가 그것을 만든 사람이 있다. 디자이너가 아이패드의 생삭만 고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협한 사고방식이다.



9. 상표 / 초월적인 힘을 꿈꾸다


164. 사회와 기업들은 상품 혹은 서비스를 생산해 내기 전에 우선적으로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이 이야기들은 생산품들에 대한 일종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는데 그것을 우리는 흔히 브랜드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 용어는 원래 태운다는 뜻의 독일어 brennan에서왔다. 옛날에 소유주를 표시하기 위해 가축에 불로 낙인을 찍던 관습을 가리키는 브랜드는 곧 타는 사물을 뜻한다. 브랜드는 상품이 아니라 상품에 대한 심리적인 아이디어다. (…) 물론 이러한 과정 속에서 브랜드는 상표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상표는 휘장에 불과하다.


10. 디스플레이 / 유혹의 무대


192. 이러한 면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픽사의 1995년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다. 굉장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고 기가 막힌 장면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가 영상 언어를 근본적으로 뒤바꿨다느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토이스토리는 동시에 장난감을 팔기 위한 광고로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메커니즘을 가진 영화였다. 픽사의 예술은 모순투성이의 복잡한 사회에서, 마케팅과 광고를 항상 염두에 둔 상태에서 탄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면은 영화의 예술적이고 시적인 내용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


11. 코드 / 그림은 어디서 끝나고 글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196. 코드란 오해를 최소화시키면서 소통을 허락해 주는 습관적인 규칙들을 말한다. 고착화된 규칙, 틀에 박힌 사고방식 혹은 생산양식, 취향의 틀 등을 코드라고 할 수있다. 비주얼디자인에서는 문자의 사용, 종이 표면에 남는 여백의 크기, 그림을 선택하거나 색을 사용하는 방식, 도표 혹은 광고에 등장하는 디자인의 배치 등이 코드가 된다.

199.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이들은 초등학교에서부터 말과 그림이 엄격하게 분리된 교육을 받는다. 읽기와 쓰기는 수업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인 반면, 그림 그리기는 창조적인 영역의 활동으로 여겨진다. (…) 이런 관행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림은 틀림없이 하나의 소통이다(그리고 어른들은 아주 많은 것들을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림을 재능의 문제로만 보면 그림에 특별한 재주가 없는 아이들에게서 생각을 시각화하고 확장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를 빼앗는 결과를 낳게 된다. 아마도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좀 더 분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후에 또 한명의 괴테가 될지도 모르는 문학적 재능을 타고난 아이가 곧장 그런 재능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고 선생님이 가르치는 일을 포기한다면 후에 어떤 결과를 기대할 것인가?

203.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이미 사용된 코드에 매달려야 한다.

207. 우리는 동시에 보고, 읽고, 해석한다. 아니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을 하는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시각을 필요로 하는 다양한 행위 하나하나에 상응하는 동사들을 열거할 수도 있다. 분석하기, 분해하기, 관계를 설정하기, 비교하기 등등. 우리는 절대로 단순히 읽기만 한다거나 혹은 단순히 바라만 보지 않는다. 모든 시각 커뮤니케이션은 하이브리드다. 만화에서처럼 우리는 그림들, 글들, 기호들이 쉽게 분류될 수 없는 방식으로 마구 뒤섞여 있는 불순한 시스템을 매일같이 만나게 된다.
>>>>>>>>>>>>불멍,물멍,하늘멍??


12. 서체 / 때로는 절망적인 노력의 역사


230. 서체를 단순화하려는 또 하나의 시도는 바우하우스에서 이루어졌다. 바로 대문자를 없애자는 시도였고 상당히 이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발상, 즉 알파벳에서도 신분의 차이를 없애자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다. 전부 소문자로 이루어진 알파벳은 곧장 첨단의 그래픽과 고급언어를 상징하는 요소로 부상했고, 급진적이고 새로운 사상과 잘 조합된다는 특성때문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이 사용되고 있다. 페이스북 로고 역시 디지털 코드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전부 소문자로 만들어졌고 반대로 샤넬의 로고는 고전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차원에서 전부 대문자로 이루어졌다.


13. 읽기 / 여백은 왜 필요한가


242. 모든 선체는 그것의 역사적 과정을 고려한 형식적이로 기능적인 차원에서의 배치를 요구한다. 이런(인쇄 혹은 표기법 등을 통해) 고착화된 전통은 우리의 지각능력을 토대로 형성되었다. 예를 들어 들여쓰기는 문단의 시작을 분명히 하고 글이 단조롭고 하나의 뚫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지는 것을 막아 준다. 이는 변주와 규칙성을 구별할 줄 아는 인간의 시각능력을 한껏 활용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246. 디지털화된 글의 경우(이것은 또 다른 읽기 시스템을 요구한다)에는 쪽번호가 없는 것이 아주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다(웹사이트들은 쪽번호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전자책이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은 종이책에 비해 전자책 속에서 훨씬 쉽게 길을 잃는다.
(…)
종이책이 생기기 전에는 두루마리 양피지가 존재했고 어떤 면에서는 디지털 문화가 이 두루마리 시스템을 다시 제안했다고 볼 수도 있다. 글을 아래위로 움직일 때 쓰는 스크롤링scrolling은말 그대로 두루마리를 푼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발표된 상당히 매력적인 이론에 따르면, 페이지들의 한쪽 면을 묶어서 책처럼 넘길 수 있도록 만든 고대의 코덱스가 성공을 거두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성경을 소설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식이 아니라 사전처럼 매일같이 참조하는 책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경이 두루마리 방식으로 제작되었다면, 창세기에서 아가서로 진행하는 것이 상당히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겠지만 코덱스는 페이지를 넘기는 것만으로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곧장 이동이 가능했다.
책의 형태는 기술적, 문화적, 실용적 요구로 탄생했다. 따라서 왜 우리가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책을 읽게 되었는지 자문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서서 혹은 앉아서 혹은 버스의 손잡이용 철봉에 기대어서 등 책을 읽는 방식은 다양할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그런 다양성이 디자인에 일정한 형태를 부여한다. 웹사이트에 들여쓰기가 더 어울릴것인지, 문단 사이에 공간을 두는 것이 더 좋을지 고민하기 전에 일반적으로 독서에 요구되는 공간이 무엇인지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디지털 문서들은 여백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가? 킨들kindle 혹은 코보kobo로읽는 소설은? 여백으로 기기 자체의 테두리면 충분한가? 혹은 더 광범위한 질문으로 돌아가, 여백은 왜 필요한가? 페이지를 시각적으로 포착하기 위해서? 아니면 글을 가리지 않고 손가락을 올려놓기 위해서?


14. 레이아웃 / 어떤 의미를 드러낼 것인가


252. 한 폭의 그림, 일러스트레이션, 사진 등은 언뜻 보면 누구든지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상 앞에서 우리가 실행에 옮기는 아주 미세한 방식과 태도들이 있다. 이는 한 개인의 선천적인 성향과 문화적인 습관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글이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규칙이 도상들 속에도 존재하리라는 느낌을 설명하기 위해 흔히 시각적 구문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도상과 글쓰기의 차이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눈이 도상을 앞에 두고 읽는 대신 탐색을 한다는 점이다. 눈의 움직임에 관한 연구들은 눈이 대상을 앞에 두고 더 중요한 몇몇 부분에 시선을 집중시키면서 반복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러한 탐색과정은 관찰자의 문화적 수준과 요구되는 과제의 종류에 따라 변한다. 다시 말해, 서로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똑같은 이미지 앞에서도 서로 다른 것을 본다고 할 수 있다. 본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을 의미하고, 누구든 자신이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마련이다.



15. 아이콘 / 우리 시대의 도상학


274. 아이콘이라는 용어는 이미지의 내용을 지칭하고 타입이라는 용어는 일정한 내용이 소개되는 방식과 그것의 기능을 지칭한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는 하나의 아이콘이고 이미지 전체를 소개할 것인지 혹은 허리 윗부분만 소개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은 타입의 선택이다. 즉 이미지의 타입(전신상화 혹은 반신상화)을 고르는 일이다. 아이콘이 이야기를 한다면, 타입은 구조를 결정한다.
*시각기호학적인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아이콘은 도형(무엇이 표현되는가)과 관련되고 레이아웃은 조형(어떻게 표현되는가)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대신에 예술 비평의 용어를 빌어 우리는 “어떻게”를 결정하는 색상과 조명, 전경 등의 요소들을 유형이라고 부를 수 있다.

277. 뉴스도 이런 효과를 이용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하나의 픽션처럼 다룬다. 따라서 아이콘은 하나의 순수한 양식상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증명사진도 색을 두 가지로 축소시키면 곧장 앤디 워홀이 된다.(…)
빛과 어둠에 대한 우리의 심리적인 반응은 생리적이다. 하지만 이런 점을 제외하면 색은 전적으로 문화적인 요소다. 하나의 순수한 색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무엇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부를 고유한 이름을 가진 무엇으로 보인다. 사실 색은 들은 말을 바탕으로 하기보다는 개념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예를 들어 풀이 녹색이라고 이야기 할때도 실제로는 녹색과 함께 노랑과 고동색을 같이 감지하는 경우가 흔하다. (…)
디자인에서 색은 감지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사물에 부여하는 성격에 가깝다.

286. 모니터, 휴대전화, 태블릿 등 여러 종류의 화면을 통해 이미지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활용도를 배가시키고 아이콘의 전통적인 원리들을 무력화하면서 이미지와 그것이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의 경계선을 변화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는 널리 알려진 비틀즈의 음반 사진에서처럼 런던의 애비 로드를 건너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백장의 사진이 올라와 있다. 한 사진이 아이콘으로 발전하는 것은 그것이 집중적으로 사용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집중적 사용은 반드시 이미지로서의 사용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애비 로드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무엇보다도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즉 관광객들이 주로 하는 일이다.

287. 교차되는 지점은 무한하고 중복되는 의미는 어쩌면 이미지의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가 활용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설 만큼 다양하다. 그런 식으로 이미지의 세계가 비대해짐에 따라 의미들은 길을 잃고 굴곡되고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한다. 여위고 수염을 기른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적인 이미지가 시리아식 얼굴을 선호하던 그리스 출신 교황들에 의해 두 세기만에(서기 7세기와 8세기) 뒤바뀐 얼굴이라는 사실을 아는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될까?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깨우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왕자가 수태고지의 낭만주의적, 부르주아적 버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들은 얼마나 될까?



16. 정확도 / 더 유용한 디자인


290. 일반적으로 그래픽은 광고와 웹사이트들을 꾸미면서 그 안의 사물들을 더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만들기 위해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방식을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래픽의 최우선 과제를 설득의 차원에서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광고회사가 도래하기 훨씬 이전)부터 비주얼디자인은 또 다른 과제, 더 고귀하진 못해도 훨씬 더 유용한 ‘설명’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293.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멋진 비유를 인용하자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사물을 비추는 거울을 사용할 수도 있고 생각한 것처럼 사물을 보여 주는 지도를 사용할 수도 있다. 사진, 그림, 실물묘사 등 은 일종의 거울이고 도표, 행렬 등은 일종의 지도인 셈이다. 가끔은 거울이면서 동시에 지도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안드레아 베살리오(1514~1564)의 매혹적인 해부학 도상들은 피부를 벗겨낸 상태의 몸을 보여 주면서 뼈와 근육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지만 동시에 회화적인 요소들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있다.


294. 정보차원에서 지하철 안내 표지판은 수학 교본과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둘 다 정확성을 추구한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둘 다 보기에 멋질 수 있지만 이것들이 가지고 있는 우선적인 목표는 분명함이다. 하지만 시각적인 차원에서 정확도란 항상 안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달성한 목표라기보다는 하나의 망원렌즈에 가깝다. 그 이유는 좀 더 일반적으로 목표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불확실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모든 담론과 마찬가지로 디자인은 주어진 정보의 해석이며, 정보의 선택은 우선적으로 하나의 중재이며 사물들을 보고 느끼는 하나의 방식이다.

297.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정보를 널리 배포하기 위해 희생되는 것은 세밀함이다.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 바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DNA의 줄기는 보이지 않는 조직에 레고 혹은 메카노 같은 구조물의 모습을 부여하면서 시각화된다. 이 이미지는 조직이 조립식 장난감처럼 소단위의 조각들로 만들어졌다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면서 하나의 형식적인 분석 모델을 제시할 뿐 아니라,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우리를 유도한다. 그것이 곧 유전공학이라는 분야다. DNA는 단순히 발견되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유포된 정보다. 전문지와 일간지, 다큐멘터리와 교과서를 통해 정보를 접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DNA가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다고 믿게 되었고 결국에는 비주얼디자인의 발명품을 하나의 불변하는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DNA는 틀림없이 존재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그려질 수도 있었다.

300. 또 다른 경우들을 보면 해석 자체가 의미의 완전한 변화를 조장할 수도 있다. 가장 충격적인 예는 다윈주의다. 유인원이 걸으면서 점차적으로 호모사피엔스가 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일러스트레이션이 있다. 사람 혹은 원숭이는 측면에서 본 상태로 그려졌고 읽기의 방향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설정되었다는 것도 진화라는 사상 자체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 일러스트레이션이 수없이 인용되고 풍자되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이것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다윈의 진화론과는 사실상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진화론은 피조물이 점차적인 진화를 통해 다른 종의 존재로 변한다는 이론이 아니다. 진화론은 우연히 발생하는 변화의 요인들이 어떤 일정 세대의 유전자 체계를 변형시키고 전 세대와 계속해서(대체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이들 가운데 적응력과 생존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난 종의 수를 배가시킨다는 이론이다. 어쨌든 호모사피엔스는 원숭이를 대체하지 않았고 네안데르탈인이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한 것도 아니다. 이런 피조물들은 함께 공존해 왔고 몇몇 종들만이 살아남았을 뿐이다. 원숭이는 아직도 존재하고 지구상에서 여전히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301. 시각적인 차원에서 정보를 전달하는 가장 뛰어난 발명품들 중에 하나는 지도다.

303. 하나의 관점을 선택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중요한 건 누가 이야기하고 왜 이야기하는가를 아는 일이다. 아무런 선택없이 어떤 측면을 강조하지 않고 말을 하거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지도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304. 지도를 왜곡하면서 정보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방식도 가능하다. 예로 월드매퍼wolrdmapper를 들 수 있다. 월드매퍼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굉장하다. 우러드매퍼의 세계지도는 입력되는 정보의 종류에 따라 대륙의 형태를 고무풍선처럼 부풀리거나 줄이는 식으로 변형시키는 알고리즘을 통해 만들어진다. 빈부의 격차를 시각화하면 유럽과 미국은 엄청난 크기로 불어나고 아프리카는 아주 작은 크기로 줄어든다. 하지만 인구밀도를 시각화하면 세계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17. 내러티브 / 이야기의 디자인


316. 쿠엔틴 피오레와 마셜 매클루언의 공저 <미디어는 마사지다>(1967)
317. 1949년에 브루노 무나리는 읽을 수 없는 책을 발명했다. 무나리의 책은 상당히 이질적인 재질과 다양한 색상의 종이들, 두꺼운 종이 혹은 반투명 용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잘라낸 종이와 구멍이 둟리거나 찢어진 종이 등을 전부 묶어서 제본한 책이다.
318. 1968년에 무나리는 <밀라노의 안개 속에서>란 책을 출간한다. 반투명 용지를 사용해서 만든 이 책은 안개가 주는 인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320. 서사적인 실험을 통해 완성된 단계에 도달했던 책들 가운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정 장르에 포함시키기 힘든 책이 한 권 있다. 이 책은 1964년 갈리마르사를 위해 로베르 마생이 만든 외젠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다. 큰 판형의 양장본으로 출판된 이 책은 명암에 차이를 두지 않고 흑백으로 불투명광택지에 인쇄되었다. 언뜻 보면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글귀들이 등장하는 인물들의 움직임에 대응하고 있다. (…) 대머리 여가수는 무대에 올릴 것을 페이지에 올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8. 사진 / 알려지지 않은 사진의 역사


332. 1862년에 최초로 사진을 찍은 사람은 니세포르 니에프스(1765~1833)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니에프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그림이 아니라 석판인쇄 기술이다. 당시에 첨단 기술 중에 하나였던 석판 인쇄 기술은 잉크에 함유되어 있는 기름이 물과 섞이지 않는다는 원리를 이용한다. 절차는 다음과 같다. 돌판 위에 유성 연필로 그림을 그린 뒤에 표면을 물로 적시고 이어서 잉크를 바르면 잉크는 물을 피해 유성 연필자국을 쫓아 모이게 된다. 이것이 지금도 여전히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오프셋이라고 하는 방식이다. 재료가 돌에서 철로, 판형작업 방식이 지털로 바뀌었을 뿐 원리는 동일하다.
어쨌든 니에프스는 이미지를 창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존의 이미지를 재생하는 시스템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던 도중에 사진기술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했던 작업은 재생용 판형을 얻기 위해 돌판 위에 이미지를 새겨 넣는 작업이었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사진을 찍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338. 매그넘이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측면은 사실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측면이다. 즉 어떤 사진이 사실의 기록이라는 것을 확인하려면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누군가 그렇다는 것을 이야기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는 아주 실질적인 문제 하나를 연상시킨다. 이미 오래전부터 미국에서 사진은 법적 효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 그런데도 우리는 사진을 항상 사실과 연관시켜서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디자인과 달리 사진은 사실주의의 또 다른 이름인 듯 느껴진다.

339. 여러가지 측면에서 사진은 르네상스 원근법의 기술적인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 개념적인 차원에서 원근법의 창시자는 브루넬레스키였다.


19 화면 / 화면 밖에서 생각하기


346. 이탈리아어로 화면을 뜻하는 스케르모schermo는 ‘방어하다’는 뜻의 롬바르디아의 고어 스키르미안skirmjan에서왔다. 즉 화면은 두 가지 사물 사이에 놓인 무언가를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화면을 우리와 앎의 대상 사이에 놓인 일종의 필터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믿기 힘들 정도로 편리하게 다양한 종류의 화면을 통해 세상과 접촉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위험이 뒤따른다. 첫 번째로 꼽아야 할 위험은 화면이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평면적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평면적이고 비유적인 의미로도 평면적이다(모든 것이 무게도 냄새도 느껴지지 않는 또렷하기만 한 이미지 속으로 축소된다). 우리가 이해하는 우주가, 혹은 적어도 우리가 흥미로워하는 세계가 하나의 사각형 공간 속에 담겨지는 것이다.

349. 모든 미디어는 최소한의 성립조건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다. (…) 사실 책(그 자체로 닫혀 있고 만들어진 사물)을 인쇄할 경우에는 모든 종류의 종이를 마음대로 잘라 사용할 수 있다. 잉크를 빨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35밀리미터, 70밀리미터, 시네마스코프 등 피할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한다. 따라서 디자인에서 중요한 건 사이즈 개념이다. 이것이 이후에 일어나게 될 모든 일을 결정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358. 그래픽이란 기본적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을 종이 위에 옮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컴퓨터만 활용한 프로젝트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20. 스타일 / 멋지다는 이유 말고


362. 스타일은 우리가 사물, 사건, 행동 속에서 지속적으로 발견하는 외관상의 특징을 가리키는 말이다. 혹은 외관을 통해 여러 가지 현상들에 있는 일련의 공통점을 발견했을 때 받는 느낌을 말한다. 스타일은 친근한 느낌을 주는, 따라서 미학적 범주에 속하는 무엇이다. 때문에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직관을 필요로 하는 것이 스타일이다.

374. 미국에서 디자이너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고 싶어하는 설계자가 아니라 소비 전략가다. 비주얼디자인은 형식의 언어가 아니라 마케팅의 오른팔이다. 이 모델은 유럽보다 덜 권위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덜 폭력적인 것은 아니다.


21. 신화 / 디자인의 깊이


382. 무엇보다도 장식을 범죄라고 여긴 사람들이 셰이커 교도들이었다. 뼈를 연상시킬 정도로 바싹 마른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들의 의자가 바로 우리가 평상시에 사용하는 의자의 원조다. 이케아보다 벌써 200년 전에 가정용 미니멀리즘을 제안했던 것이 바로 셰이커 교도들이었다.

383. 이 신화(새로움을 향한 열광)의 근거를 이루는 요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새로운 것을 우상으로 여기는 경향 자체는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가장 선호하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대체가능한 상품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갈망해야만 돈이 돌 수 있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 시스템을 비판하면서 반대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새로운 것을 하나의 발전과 전진의 형태로 이해한다. 이들은 새로운 시각언어를 항상 새로운 사회적 현식을 예고하는 것으로 본다.
이 대조적인 입장들을 만들어 낸 것은 디자인이 아니라 예술 일반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를 우리는 예술언어들이 최근 100년 동안 앓고 있는 신경증 증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술과 과학이 이룩해 낸 혁명적인 성과 앞에서, 객관적이지 않은 경우에도 측량을 가능케 하는 결과들 앞에서, 예술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줄곧 담당해왔던 주인공으로서의 자리(한 문명의 가장 뛰어난 면들을 상징하는 역할)를 빼앗긴 채 무기력한 상태로 남아있다. 예술은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과학을 최악의 방법으로 모방하기 시작했고, 혁신을 위한 혁신을 내세우는 아방가르드의 암적인 경쟁의식은 패배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싸움을 벌였다. 그래서 자기만족이라는 필수적인 제례의식을 치러야만 했다.
물론 이런 평가는 편파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예술 속에서 가치란 역사적이고 관행적인 카테고리들과 분리될 수 없고 발전 역시 상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84. 새로운 것을 절대적인 이상으로 바라보는 신화 옆에 쌍둥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신화가 등장한다. 이 신화의 이름은 젊음이다. 가치를 보증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신화로서의 젊음이다. <보그>는 이미 1959년의 한 기사에서 young이라는단어가 젊은 가수, 젊은 사업가, 젊은 디자이너에서처럼 도처에 등장한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391. 디자인은 예술인가? (…) 하지만 먼저 오늘날 예술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전적으로 예술적인 성격의 분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최근 100년 동안 미의 영역은 계속해서 확장되기만 했다. 마르셀 뒤샹 이후로는 아무도 예술의영역을 정확하게 규정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예술이란 문화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모든 개념과 마찬가지로) 유동적인 아이디어다. 그리고 모든 문화적인 영역은 고유의 예술적인 특징과 필요조건을 가지고 있다. (…)
예술은 그것의 표현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는 활동, 즉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감각적, 감정적, 지적 경험의 확장을 통해 아름다움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는 활동을 말한다. 인생을 느끼는 방식 혹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하는 활동이 예술이다.

392. 어쨌든 모더니즘 이후로 디자인이 안고 있던 문제는 디자인이 과연 예술안에 있는가, 아니면 밖에 있는가라는 문제였다. 모든 것은 디자인이 하나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반면 예술은 그렇지 않다는 결론에서 출발했다. 디자인은 문제를 해결하지만 예술은 반대로 초월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자기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런 기능도 가지고 있지 않은 예술은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 (…)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은 아무리 천재적이고 멋지다고 해도 아주 명확한 기능들을 가지고 있다. 이는 주식의 기능과 비슷하다. 디자인 과 그래픽의 기능이 분명해 보이는 반면 예술의 그것은 감추어져 있다느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예술이 원하는 스스로의 가치가 찬란한 무용성과 일치하기 떄문이다.

394. 어떤 물건이 예술인지 디자인인지 혹은 광고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상황과 문맥이다.

399. 디자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형태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아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