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 방/공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잔잔 2022. 3. 28. 22:36


작년 4월에 이사와서부터니까, 거의 1년간 내 침대위에 있던 책이다.
자기전에 조금씩 읽었는데 어제 마지막장을 넘겼다. 사실 두 번째 읽는 책이다.
처음읽었을때는 다른 사람들과 독서모임에서 읽었는데, 그때보다 전율은 덜했다.
시간이 더 흘렀기 때문인지 그래서 내가 변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역시 아무래도 두 번째보다 처음이 더 설레기 때문인지 잘모르겠지만
첫번째 읽을 때 이책은 꼭 두 번, 세 번 읽어야지,라고 생각해두었다.
그리고 읽다가 접어둔 부분을 기록해둔다.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처음 읽었을 때 소설 초반에 나오는 저 단호한 문장들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그럼 어떡하라는 거지? 우리는 한 번 사는데?
처음 읽고 난 후 기억나는 내 모습은 도서관에서 빌려읽고 엄청난 책이라고, 소리치며 책을 구입했던 모습이다.
하드커버로 나온 버전에서 책표지가 카레닌인 점을 매우 맘에 들어했던 것과 함께.




파악할 수 있는 거짓과 이해할 수 없는 진리, 이중노출, 반복의 변주, 공명, 확장
영원회귀, 원형으로 흐르는 시간, 1번 행성 지구, 가벼움, 무거움
인간-동물, 예를 들어 소를 우유기계 혹은 피비린내나게 만든 인간의 근본적인 실패,
전체주의, 키치, 배신, 사비나
음악, 악보, 모티프, 미적차원, 아름다움, 우연, 시적기억


1부 가벼움과 무거움

61. 파르메니데스와는 달리 베토벤은 무거움을 뭔가 긍정적인 것이라고 간주했던 것 같다. “Der schwer gerasste Entschluss.” 진중하게 내린 결정은 운명의 목소리와 결부되었다.(“es muss sein!”)무거움, 필연성, 그리고 가치는 내면적으로 연결된 세 개념이다. 필연적인 것만이 진중한 것이고, 묵직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은 베토벤의 음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을 작곡가 자신보다는 베토벤의 해설가에게 돌리는 것도 가능하겠지만(아니면 그럴 만한 개연성이 있겠지만) 우리는 오늘날 이런 신념에 어느 정도 동조한다. 우리 생각에는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아틀라스가 어깨에 하날을 지고 있듯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베토벤의 영웅은 형이상학적인 무게를 들어올리는 역도 선수다.

65. 토마시는 그의 친구 Z에 대해 테레자가 한 말을 떠올리고 그들의 사랑의 역사는 “Es muss sein!”이라기 보다는 ‘Es konnte auch anders sein.(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에 근거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칠 년 전 테레자가 살던 도시의 병원에 우연히 치료하기 힘든 편도선 환자가 발생했고, 토마시가 일하던 병원의 과장이 급히 호출되었다. 그런데 우연히 과장은 좌골신경통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대신 토마시를 시골 마을에 보냈던 것이다. 그 마을에는 호텔이 다섯 개 있었는데, 토마시는 우연히 테레자가 일하던 호텔에 들었다. 우연히 열차가 떠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그는 술집에 들어가 앉았던 것이다. 테레자가 우연히 당번이었고 우연히 토마시의 테이블을 담당했다. 따라서 토마시를 테레자가에게 데려가기 위해 여섯 우연이 연속적으로 존재해야만 했고, 그것이 없었다면 그는 테레자에게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2부 영혼과 육체

70. 한때 인간은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규칙적인 박동 소리를 듣고 놀라 기겁을 하며 이것이 무엇일까 궁금해한 적이 있었다. 육체처럼 낯설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물이 자신과 일체를 이룬다고 인간은 생각할 수 없었다. 육체는 껍데기고, 그 안에서 뭔가가 보고, 듣고, 두려워하고, 생각하고, 놀라는 것이다. 이 무엇, 남아있는 잔금, 육체로부터 추론된 것, 이것이 영혼이다.
물론 오늘날 육체는 더 이상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다. 가슴 속에서 뛰는 것은 잘 알려졌다시피 심장이고, 코란 산소를 폐에 공급하기 위해 몸통에서 돌출된 파이프 끝에 불과하다. 얼굴이란 소화 작용, 시각, 청각, 호흡, 반사작용 같은 모든 육체적 메커니즘이 집결된 계기판에 불과하다.
인간은 신체의 모든 부분에 이름을 붙이고 난 후부터 육체에 덜 불안해했다. 또한 이제는 영혼이란 뇌의 피질부 활동에 불과하다는 것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은 과학 전문용어에 가렸고 오늘날에는 그저 싱거운 웃음을 자아내는, 시대에 뒤떨어진 편견에 불과하다.
그러나 누군가를 민친 듯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창자가 내는 꾸르륵 소리를 한번 듣기만 한다면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 과학시대의 서정적 환상은 단번에 꺠지고 말 것이다.

85. 아무튼 방금 그녀를 불렀던 남자는 낯선 동시에 은밀한 동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중한 말투로 말했고, 테레자는 자신의 영혼이 그 남자에게 모습을 드러내려고 그녀의 모든 정맥, 모세혈관, 모공을 통해 표면으로 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91.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라디오에서 베토벤의 음악이 나오는 순간 토마시가 술집에 등장, 역에서의 죽음-안나카레니나 소설의 시작과 끝)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안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마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과 죽음의 테마, 사랑의 탄생과 결부되어 잊을 수 없는 이 테마가 그 음울한 아름다움으로 절망의 순간에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예컨대 브론스키, 안나, 플랫폼, 죽음의 만남이나 혹은 베토벤, 토마시, 테레자, 코냑 잔의 만남 가은 것)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113. “이 그림은 망친거야. 붉은 물감이 캔버스에 흘렀거든. 처음에는 화를 냈는데 점차 그 얼룩이 맘에 들더군. 그 공사장이 진짜가 아닐 뿐 아니라 눈속임용으로 그려 넣은 낡은 무대장치 같았고, 붉은 물감 자국은 찢어진 틈같았기 때문이지. 그래서 나는 이 틈을 확대해서 그 뒤에서 볼 수 있을 것을 상상하는 놀이를 시작했어. 그런 이유로 내가 그린 첫 연작을 무대장치라 불렀던 거야. 물론 아무도 내 그림을 보진 못하게 했지. 보았다면 나는 퇴학당했을 거야. 앞은 완벽한 사실주의 세계였고, 그 뒤에는 무대장치의 찢어진 캔버스 뒤편처럼 뭔가 다른 것, 신비롭고 추상적인 것이 보였지.”
그녀는 말을 멈추더니 다시 덧붙였다.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였지.”
테레자는 어떤 교수라도 학생의 얼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막힌 집중력을 발휘하며 구를 기울였다. 그녀는 사비나의 모든 작품이 예나 지금이나 실은 항상 같은 것을 말하며 두 주제, 두 세계의 동시적 만남이자 마치 이중노출로 탄생한 사진 같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 풍경, 그리고 뒤에서 투명하게 비치는 불 켜진 머리맡 램프. 사과와 호두와 불 켜진 크리스마스트리가 그려진 서정적 정물화 너머로 그것을 찢는 손.

130. 카레닌은 스위스로 가는 것을 한 번도 탐탁하게 여겨 본 적이 없다. 카레닌은 변화를 싫어했다. 개에게 있어서 시간은 곧게 일직선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시간의 흐름도 하나가 지나면 다음 것으로 가는, 점점 멀리 앞으로 가는 쉼없는 운동도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은 손목시계 바늘처럼 원운동을 했다. 시곗바늘 역시도 미친 듯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같은 궤도를 따라 하루하루 시계 판 위엫서 원 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프라하에선 새소파가 놓이거나 화분의 자리만 달라져도 카레닌은 분개했다. 그의 시간 감각이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이었다. 마치 쉴 새 없이 시계 판의 숫자를 갈았을 때 시곗바늘이 겪는 혼돈 같은 것이었다.

151. 사비나의 삶이 음악이었다면, 중산모자는 그 악보의 모티프였다. 이 모티프는 영원히 되풀이되었으며 매번 다른 의미를 띠었다. 그 모든 의미는 마치 물이 강바닥을 스치고 지나가듯 중산모자를 거쳤다. 그리고 내 생각에 그것은 헤라크레이토스의 강바닥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물에서 두 번 목욕하지 않는다!” 중산모자는 강바닥이었고, 사비나는 매번 다른 강물, 다른 의미론적 강물을 보았던 것이다. 같은 대상이 매번 다른 의미를 야기했지만 그 의미는 이전의 다른 모든 의미가 공명을 일으켰다. (마치 하나의 메아리, 꼬리를 무는 메아리들처럼) 새로운 체험은 보다 풍부한 화음으로 공명을 일으켰다.



3부 이해받지 못한 말들

156. 배신. 우리 어린시절부터 아빠와 교사들은, 배신이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한 것이라고 누차 우리에게 말하곤 했다. 그러나 배신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배신한다는 것은 줄 바깥으로 나가느 ㄴ것이다. 배신이란 줄 바깥으로 나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사비나에게 미지로 떠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166. 그녀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는 망명객들과의 불화보다는 그녀 자신의 생각에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자기 생각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았다. 체코인 중에는 검지가 기형적으로 긴 그런 작자와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그녀의 발언에 뒤따른 거북한 침묵은 모든 사람이 그녀의 말을 거부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로 몰이해와 증오의 분출에 당황했으며 망명중인 모든 사람이 그의 희생자였다. 그때 그녀는 왜 차라리 그들에게 동정심을 갖지 않았을까? 왜 그들도 버림받아 측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이미 그 대답을 안다. 그녀가 아버지를 배신했을 때, 삶은 길고 긴 배반의 길처럼 그녀 앞에 활짝 열렸고, 매번 새로운 배반은 마치 악덕처럼, 승리처럼 그녀를 유혹했다. 그녀는 대열 속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고 머무르지도 않을 것이다! 항상 같은 사람, 같은 단어들과 더불어 대열 속에 영원히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185. 그녀가 청년 노동대에서 일하던 학창 시절, 스피커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던 경쾌한 행진곡에 마음속으로 독을 품었던 그녀는 어느 일요일, 오토바이를 타고 떠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숲속을 수킬로미터 달려 골짜기에 파묻혀 있는 이름 모를 조그마한 마을에 멈췄다. 교회 벽에 오토바이를 기대 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미사를 올리는 중이었다. 그 당시에 종교는 공산주의의 박해를 받았고 사람들 대부분은 교회를 피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노인들뿐이었는데 그들은 정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죽음만을 두려워했다.
사제가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 한 구절을 말하면, 사람들은 뒤를 이어 입을 모아 이를 되받았다. 위령기도였다. 경치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순례자처럼, 삶과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똑같은 단어가 반복되었다. 그녀는 한구석의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단지 음악을 듣기 위해 가끔 눈을 감았고 그러다가 다시 눈을 떴다. 그녀 머리 위로 푸른 궁륭이 보였고 그 궁륭 위에는 커다란 황금빛 성좌가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이교회에서 예기치 않게 만난 것은 신이 아니라 아름다움이었다. 이 교회와 위령 기도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녀가 소란스러운 노래 속에서 며칠을 보냈던 청년 노동대와 비물질적으로 유사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임을 그녀는 잘 알았다. 미사는 마치 배반당한 세계처럼 느닷없이, 음성적으로 그녀에게 나타났기에 아름다웠다.
그날 이후 그녀는 아름다움이란 배반당한 세계라는 것을 알았다. 그 아름다움이란 박해자들이 실수로 어딘가에서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만 만날 수 있다. 아름다움은 노동절 행렬의 배경 뒤편에 숨어있느 것이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배경이 그려진 화폭을 찢어야만 한다.

204. 지금까지는 배반의 순간들이 그녀를 들뜨게 했고, 그녀 앞에 새로운 길을 열어 주고, 그 끝에는 여전히 또 다른 배반의 모험이 펼쳐지는 즐거움을 그녀의 가슴에 가득 채워 주곤 했다. 그러나 여행이 끝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부모, 남편, 사랑, 조국까지 배반할 수 있지만 더이상 부모도 남편도 사랑도 조국도 없을 때 배반할 만한 그 무엇이 남아있을까?
사비나는 그녀를 둘러싼 공허를 느꼈다. 그리고 바로 이 공허가 그녀가 벌인 모든 배신의 목표였다면?
물론 지금까지 그녀에게 이런 의식은 없었고,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베일에 가린 법이다. 결혼을 원하는 처녀는 자기도 전혀 모르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명예를 추구하는 청년은 명예가 무엇인지 결코 모른다.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한 미지의 그 무엇이다. 사비나 역시 배신의 욕망 뒤에 숨어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것이 목표일까? 제네바를 떠나온 이래 그녀는 이 목표에 부쩍 가까워졌다.




5부 가벼움과 무거움

293. 그래서 토마시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와 동침하는 줄 몰랐지만 사태의 진상을 알자 자신이 결백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자신의 무지가 저지른 불행의 참상을 견딜 수 없어 그는 자기 눈을 뽑고 장님이 되어 테베를 떠났던 것이다.
토마시는 영혼의 순수함을 변호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악쓰는 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당신의 무지 탓에 이 나라는 향후 몇 세기 동안 자유를 상실했는데 자신이 결백하다고 소리칠 수 있나요? 자, 당신 주위를 돌아보셨나요? 참담함을 느끼지 않나요? 당신에겐 그것을 돌아볼 눈이 없는지도 모르죠! 아직도 눈이 남아 있다면 그것을 뽑아 버리고 테베를 떠나시오!

324. 그러나일단 새로운 삶의 경악스러운 이질감을 극복하자(일주일쯤 지난뒤) 그는 자신이 길고 긴 휴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어떤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는 일을 했고 그것이 아름답다 생각했다. 그는 내면적 “es muss sein!”에 의해 인도되지 않은 직업에 종사하며 일단 일을 끝내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사람들(그때까지 항상 동정했던 사람들)의 행복을 이해했다. 그는 한 번도 이런 행복한 무관심을 체험하지 못했다. 예전에 그는 그가 원한 대로 수술을 성공하지 못하면 절망에 빠져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심지어는 여자에 대한 입맛을 잃기까지 했다. 그의 직업이 지닌 “es muss sein!”은 그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와도 같았다.
이제 그는 유리창을 닦는 긴 막대기를 들고 프라하를 누비고 다녔으며 십년은 젊게 느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다.

327. ‘자아’의 유일성은 다름 아닌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어있다. 인간은 모든 존재에 있어서 동일한 것,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만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개별적 ‘자아’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따라서 미리 짐작도 계산도 할 수 없으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베일을 벗기고 발견하고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만 하는것이다.

343.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357. 그는 화가 났고 그들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모든 일이 오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선악의 경계는 끔찍할 정도로 모호하지요. 나는 누구의 징계도 요구하지 않았으며, 그런 것은 전혀 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을 징계하는 것은 야만입니다. 오이디푸스의 신화는 아름다운 신화죠. 그러나 그것을 이런 방식으로 이용한다는 것은…..” 그는 뭔가 덧붙이려다가 그가 말하는 것이 어쩌면 녹음될지도 모른다는데 문득 생각이 미쳤다.

361.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이 소설 첫머리에서 내게 드러났던 그의 모습을 본다. 그는 창가에 서서 건너편 건물 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이 이미지에서 탄생했다. 이미 말했듯 소설 인물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처럼 어머니의 육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상황, 하나의 문장, 그리고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본질적인 것은 여전히 언급되지 않았찌만 근본적이며 인간적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은유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작가란 자기 자신 이외의 것은 말할 수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
마당에서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것, 사랑이 고조된 순간 자기 배 속에서 끈질기게 꾸르륵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 배신하고 또한 이토록 아름다운 배신의 길 중간에서 멈출 수 없는 것, 대장정 행렬 속에서 주먹을 치켜드는 것, 경찰이 숨겨 둔 도청 마이크 앞에서 유머 감각을 과시하는 것 등. 나도 직접 이런 상황을 겪어 보았다. 그러나 내 이력서 속 자아로부터 그 어떤 인물도 도출되지 않았다.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며 동시에 그 모두가 한결같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가 우회하기만 했던 경계선을 뛰어넘었다. 나는 바로 이 경계선(그 경계선을 넘어가면 나의 자아가 끝난다)에 매혹을 느낀다. 그리고 오로지 경계썬 저편에서만 소설이 의문을 제기하는 신비가 시작된다.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 자, 이제 그만하자. 토마시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366. 얼마 후 그는 다시 이런 생각을 했고, 나는 앞 장의 뜻을 밝히기 위해 이를 언급하고자 한다. 우주 어디엔가 우리가 두 번째 태어나는 행성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또한 지구에서 보낸 전생과 거기에서 익힌 경험을 완벽하게 기억한다고 해 보자.
그리고 이미 두 번의 전생 체험을 가지고 세 번째로 태어나는 또 다른 행성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인류가 매번 더욱 성숙하면서 다시 태어나는 다른 행성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영원회귀에 대한 토마시의 생각이다.
지구(1번 행성, 미체험 행성)에 사는 우리는 당연히 다른 행성에서 인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막연한 개념밖에 지닐 수 없다. 인간이 더 현명해질까? 인간이 완숙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반복함으로써 이에 도달할 수 있을까?
비관주의와 낙관주의가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 속에서만 가능하다. 낙관주의자란 5번 행성에서는 인간 역사가 피를 덜 흘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비관주의자란 그런 것을 믿지 않는 자이다.

391. 그는 플라톤의 <향연>의 유명한 신화를 떠올렸다. 옛날에 인간은 양성을 동시에 지녔고, 신이 이를 반쪽으로 분리해서 그때부터 서로 반쪽을 찾으려고 헤맸다는 것이다. 사랑ㅇ이란, 우리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욕망이다.




6부 대장정

401. 고대 그노시스파 사람들도 다섯 살의 나처럼 이를 분명하게 느꼈다. 이 저주받은 문제를 단칼에 해결하기 위해 2세기 그노시스파의 대스승 발랑텡은 예수는 “먹고 마시지만 절대 똥은 싸지 않는다.”라고 단언했다는 것이다.
똥은 악의 문제보다 더욱 골치아픈 신학문제다.

442. 프라하에서 정치범 사면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던 기자에 대해 나는 생각해 보았다. 그 사람은 그 캠페인이 정치범을 돕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진정한 목표는 정치범의 석방이 아니라 아직도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다. 그가 했던 것도 구경거리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가능성이 없었다. 그에게는 행동과 구경거리 사이에서 선택할 권리가 없었다. 그에게는 한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구경거리를 제공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인간이 구경거리를 제공할 수 밖에 없게 선고된 상황이 있게 마련이다. 침묵하는 권력(강건너의 침묵하는 권력, 벽 속에 숨긴 조용한 도청 장치로 변신한 경찰)에 대항하는 그의 전투란 군대를 공격하는 연극 단원의 전투인 것이다.



7부 카레닌의 미소

472. 창세기 첫 머리에 신은 인간을 창조하여 새와 물고기와 짐승을 다스리게 했다고 씌어 있다. 물론 창세기는 말(히이잉)이 아니라 인간이 쓴것이다. 신이 정말로 인간이 다른 피조물 위에 군림하길 바랐는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인간이 암소와 말로부터 탈취한 권력을 신성화하기 위해 신을 발명했다고 하는 것이 더 개연성 있다. 그렇다, 염소를 죽일 권리, 그것은 가장 피비린내나는 전쟁와중에도 전 인류가 동지인 양 뜻을 같이 한 유일한 권리다.

477. 테레자는 태평하게 무릎을 베고 누운 카레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대충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자기와 비슷한 대상에게 잘 대해 준다는 것은 아무런 미덕도 아니다. 테레자는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거기에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토마시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랑받는 여인으로 처신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토마시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우리와 타인의 관계가 어디까지 우리 감정, 우리 사랑이나 비-사랑, 우리 호의 혹은 증오의 결과인지 또는 어디까지가 개인 간 역학 관계에 의해 사전에 규정되었는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참된 선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순수하고 자유롭게 베풀어질 수 있다. 인류의 진정한 도덕적 실험, 가장 근본적 실험,(너무 심오한 차우너에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그것은 우리에게 운명을 통째로 내맡긴 대상과의 관계에 있다. 동물들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인간의 근본적 실패가 발생하며, 이 실패는 너무도 근본적이라 다른 모든 실패도 이로부터 비롯된다.

490. 개는 결코 낙원에서 추방된 적이 없다. 카레닌은 영혼과 육체으 이원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혐오감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테레자는 그의 곁에 있으면 기분이 좋고 편안했던 것이다. (…) 카레닌과 자신을 잇는 사랑은 자기와 토마시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보다 낫다. 더 크다는 것이 아니라 낫다는 것이다. 테레자는 자기자신이나 토마시 그 누구도 비난하고 싶지 않았고 그들이 서로를 더 사랑할 수 있다고 단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은(적어도 여러 형태중에서 최상의 경우라도) 본질적으로 개와 인간 사이의 사랑보다 열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인간 역시 이러한 기형태는 아마도 조물주가 계획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이다. 테레자는 카레닌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조차 강요하지 않는다. 그녀는 인간 한쌍을 괴롭히는 질문을 한 번도 해본적이 없다. 그가 나를 사랑할까? 나보다 다른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가 나를 더 사랑할까? (…)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사랑)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도 있다. 테레자는 카레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를 자신의 모습에 따라 바꾸려 들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그가 지닌 개의 우주를 수락했고 그것을 압수하고 싶지 않았으며 그의 은밀한 성향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지도 않았다.

492.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떤 인간 존재도 다른 사람에게 전원시를 선물할 수 없다. 오로지 동물만이 할 수 있는데, 동믈만이 천국에서 추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과 개 사이의 사랑은 전원적이다. 갈등이나 가슴이 메이는 장면, 진화 같은 것이 없는 사랑이다. 카레닌은 토마시와 테레자 주위로 반복에 근거한 삶의 원을 그었고 두 사람도 그에게 같은 일을 해주길 기대했다.
카레닌이 개가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틀림없이 테레자에게 오래전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봐, 매일같이 입에 크루와상을 물고 다니는 게 이제 재미없어. 뭔가 다른 것을 찾아 줄 수 있겠어?” 이 말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심판이 담겨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라고 테레자는 생각한다.

507. 토마시가 말을 이었다. “나는 항상 신앙인을 존경했어. 그들에겐 나에게는 없는 특별한 초감각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지. 점쟁이들처럼 말이야. 그런데 내 아들의 경우를 보니 신앙인이 되는 것은 사실 아주 쉽다는 걸 깨달았어. 그가 곤경에 처했을 때 가톨릭 신자들이 그를 돌봐주었고 그 때 갑자기 신앙심을 발견한 거야. 어쩌면 감사의 뜻으로 그런 결심을 했을거야. 인간적인 결심이란 끔찍할 정도로 쉬운 거지.”

509. “솔직히 말해서 아들과의 만남이 두려워. 바로 그래서 나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았던 거야. 내가 왜 이리 고집불통인지 나도 모르겠어. 어느 날 어떤 결심을 하면 왜 그런 결심을 했는지조차 모르면서 그 결심에는 자기 고유의 관성이 생기는거야. 세월이 흐를수록 그것을 바꾸는 게 더 힘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