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 방/공책

컬러의 말 the secret lives of colour 모든색에는 이름이 있다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

 잔잔 2022. 4. 10. 19:15



39. 하양계열
‘이렇듯 감미롭고 명예롭고 숭고한 것들이 전부 거듭해서 흰색과 관련되는데도 불구하고 이 색의 가장 깊은 관념 속에는 파악하기 어려운 뭔가가 도사려서, 두려움을 자아내는 피의 붉은색보다 더 많은 공포를 영혼에 안겨준다.’ 허먼 멜빌의 작품 <모비 딕> 42장의 한 구절이다. ‘고래의 흰색’이라는 제목을 붙인 장에서 그는 흰색의 골치아프고 이분법적인 상징성에 대해 참된 훈계를 늘어놓는다. 빛과 얽힌 탓에 흰색은 인간의 심리에 주로 신성한 대상에 대한 이미지로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니 경외와 공포를 함께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소설의 제목과 같은 백색증의 거대 바다 괴물 모비 딕이 보여주듯 흰색은 타자성을 품는다. 사람을 위한 색깔이라면 숭앙받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그다지 썩 인기가 없다. 너무 배타적이고 전체적이고 신경질적이다. 일단 빚어내기부터 어렵다. 다른 색깔의 물감을 섞어서 만들 수 없으니 특별한 흰색염료를 써야한다. 게다가 어떤 염료를 섞더라도 바뀌는 색깔은 오직 한 방향, 즉 검정색으로 나아갈 뿐이다. 왜그럴까. 인간의 뇌가 빛을 처리하는 방식 탓이다. 염료가 더 많이 섞일수록 눈으로 반사되어 들어오는 빛의 양이 적어지므로 갈수록 어둡고 칙칙해보인다.

40. 흰색은 오랫동안 자본과 권력에 밀접하게 연계되었다. 양모나 면을 포함한 섬유는 엄청나게 가공해야 흰색을 띤다. 16~18세기에는 아주 부유해서 하인을 많이 거느린 사람만 깨끗한 레이스나 마 소매, 러프, 크라바트 등을 입을 수 있었다. 이는 오늘날에도 바뀌지 않았다. 눈처럼 흰 겨울 외투를 입은 이는 ‘대중교통을 탈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라는 미묘한 시각 메시지를 드러낸다. <색층분석>의 저자 데이비드 바츨러는 오롯이 흰색으로 장식된 부유한 미술 수집가의 집에 찾아간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흰색보다 더 흰색이 있다. 거기에서 본 흰색이 그랬다. 열등한 모든 것, 그러니까 거의모든 사물을 튕겨내는 흰색이다. 공격적인 흰색 말이다.

화이트워시(회)
회는 석회와 칼륨염이나 소금, 물을 섞어 만드는 가장 싼 물감이다. 1848년 영국에 독감 및 티푸스가 창궐했을 때 공동주택의 한 동 안팎을 전부 칠하는 데 7페니, 노임을 빼면 5페니 반이 들었다. 회는 쓸만하지만 좋은 물감은 아니었다. 쪼가리가 부스러지면서 떨어져 매년 다시 칠해야할뿐만아니라 주재료 비율이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옷에 묻어날 수도 있었다. 한편 소독 기능 덕에 유제품 외양간이나 헛간을 칠하는 농가에서 인기를 누렸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톰 소여의 모험1876>에서도 회는 유명세를 탄다. 싸움 탓에 더러워진 톰에게 폴리 아줌마가 벌로 폭 30에 높이 9야드짜리 담장을 칠하라고 시킨 일화다.
폴리 숙모 이전에도 벌로 회칠을 시킨 이는 많다. 종교개혁 기간 동안 교회와 교구는 이제 불경하다고 낙인찎은 성자의 벽화나 제단화를 회칠해 덮었다. (세월이 지나 회가 벗겨지면서 다시 얼굴이 드러나기는 했다) 이러한 사례가 특히 태생적으로 정치에서 흔한 ‘눈가림하다(whitewash)’, 즉 불쾌한 사실을 은폐하려는 시도를 일컫는 의미로 쓰이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역병과 싸웠던 이들에게 들통에 담긴 우윳빛 소독 석회는 위안을 주다 못해 의식적이었다. 의사가 흰 가운을 입기 시작해 의학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시기가 이때라는 게 과연 우연일까?


65. 노랑계열
인간에게는 노란색이 대체로 질환의 전조다. 혈색이 나쁜 피부나 황달, 담즙 문제 등 말이다. 집단이나 무리로 따져보면 인식은 더 나쁘다. 저널리즘에 달라붙으면 무모한 선정주의를 의미한다. 동양, 특히 중국에서 20세기 초에 유렵이나 북미로 이민을 온 이들에게는 ‘황색 재난’이라는 딱지가 붙어다녔다. 순진한 서양을 덮치는 인간 이하의 무리를 잭 런던은 재잘거리는 노란색 군중이라 일컬었다. 그리고 나치가 유태인에게 착용을 강요한 노란 별이야말로 오명의 가장 악명 높은 상징이다.
중세에도 하찮은 취급을 받은 이들이 노란색 옷을 입거나 표식을 붙이고 다녔다.
하지만 노란색은 정반대로 가치와 아름다움의 상징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서양에서는 블론드는 이상적인 머리색 취급을 받아왔다. 경제학자는 옅은색 머리의 매춘부가 돈을 더 받을 수 있었으며 인구 비율보다 더 많은 금발이 광고에 등장함을 밝혔다. 중국에서는 노란색의 인쇄물이 포르노 책이나 이미지를 의미하지만 어떤 달걀 노른자의 색깔(임페리얼 옐로)은 황제의 사랑을 받았다. 당나라의 초기 문헌에 의하면 ‘평민과 관료에게는 붉은기가 도는 노란색의 의복착용’을 명시적으로 금지시킨 한편 황궁의 지붕은 같은 색으로 칠했다.
인도에서 노란색은 현세보다 영혼의 세계에 위력을 더 미친다. 평화와 지식의 상징인 크리슈나는 대개 푸르스름한 연기색의 피부에 생생한 노란색 가운을 입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미술사학자이자 저자인 B.N.고스와미는 ‘노란색은 모두를 한데 아우르고 영혼을 북돋으며 시야를 넓혀주는 풍성하게 빛나는 색’이라 묘사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금속의노란색이 가장 큰 인기를 누린 것 같다. 연금술사는 다른 물질을 금으로 바꾸려는 시도에 몇 세기 동안 매달렸으며 위조 금 만드는 법은 널려 있다.

애시드 옐로
조잡한 디자인-오롯이 밝은 노란색 동그라미에 까만색의 작은 선으로 그린 두 눈, 그리고 반원호의 입-의 의미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조잡한 스마일리는 1963년 미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등장했다. 필라델피아의 형제가 비슷한 디자인을 배지에 찍었는데 1972년까지 5,000만개가 팔렸다. 하지만 1970년대의 정치적인 격동기에 아이 같은 분위기의 스마일리는 전복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1988년에는 딱히 이치에 맞지는 않지만 대중문화의 현상으로 음악과 새로운 클럽가의 상징이 되었다. 노란색 스마일리는 토킹헤드의 사이코킬러, 밤더 베이서의 비트디스의 영국판 표지와 런던에 있는 슈룸 클럽의 상징적인 홍보물에 그리고 이후에는 너바나의 비공식 로고로(양쪽 눈이 멀고 우물쭈물하는 입모양으로 변형된 형태)쓰였다.
곧 스마일리의 애시드 옐로는 춤을 즐기는 젊음, 크나큰 기쁨의 순간, 서서히 퍼져나가는 화학적이고 반항적인 순간의 상징색으로 자리잡았다.

크롬 옐로
찌는듯한 1888년의 여름은 반 고흐에게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그는 프랑스 남부 아를의 노란 집에서 영웅인 폴 고갱의 도착을 조바심내며 기다리고 있었다. 반 고는 아를에 둘이 함께 화가 공동체를 설립하기를 바랐고 미래를 낙관했다.
화가와 미술 애호가들에게는 슬프게도 크롬옐로는 시간이 지나며 갈색으로 변하는 단점이 있다. 암스테르담에서 반 고흐의 그림을 수년간 연구한 학자들은 햇볕에 노출된 꽃잎의 크롬옐로가 심각할 정도로 진하게 변색되었음을 밝혔다. 그래서 반 고흐의 해바라기는 실제 꽃이 그렇듯 시드는 것처럼 보인다.


95. 오렌지 계열
과일이 색에서 이름을 따왔는지, 색이 과일에서 이름을 따왔는지 궁금했다면 이제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다. 오렌지는 아마 중국에서 처음 경작된 뒤 서양으로 서서히 퍼져나갔고, 그 이름 역시 생각없이 버린 돌돌 말린 껍질처럼 퍼져나갔다. 페르시아에서는 나랑, 아랍에서는 나라니였고 산스크리트어의 나랑가, 스페인어의 나랑하, 프랑스어의 오렝쥬, 그리고 마침내 영어의 오렌지가 되었다. 색의 이름으로는 16세기나 되어서야 쓰이기 시작했으며 이전에는 번거로운 조어인 지올루레아드 또는 황적색으로 불렸다. 오렌지라는 단어가 색의 이름으로 쓰인 첫 번째 기록 문헌은 1502년 마가렛 튜더를 위해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오렌지색의 사서넷을 잔뜩 샀다’는 기록이다.
러시아의 추상화가 바실리 칸딘스키는 1912년의 논문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 ‘오렌지는 자신으 힘을 확신하는 남자와 같다’고 썼다. 오렌지에 자신감이 배어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파란색이 흐릿한 미지수를 상징한다면 색상환의 정반대편에 있는 오렌지는 긴급함의 색으로 위험을 경고하는 데 쓰인다.
항공기의 비행 정보를 기록하는 블랙박스도 이름과 달리 오렌지로 칠한다. 추락했을 때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는 바람을 담은 것이다.

더치 오렌지
네덜란드는 빌럼 1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오렌지색을 열정적으로 채택했다. (네덜란드가 선호하는 색조는 세월이 흐르며 바뀌었다. 현대 회화에서 오라녜 가문이 입은 오렌지색은 거의 탄 호박색에 가깝다. 오늘날에 선호되는 색조는 쩅한 감귤색이다) 별것 아닌 당근을 예로 들어보자. 남미가 원산지이며 쓰고 질긴 구근인 당근은 17세기 이전에 자주색 또는 노란색이었다. 하지만 이후 100여년동안 네덜란드 농가에서 선택 교배를 통해 오렌지색 품종을 만들어냈다. 한편 오늘날 파란색, 흰색, 빨간색의 조합인 네덜란드 국기는 원래 빌럼 1세의 상징 색을 기려 파란색, 흰색, 빨간색과 오렌지색의 줄무늬였다. 하지만 색이 빠지지 않는 염료를 찾을 수가 없어서 오렌지 색은 노란색으로 바래거나 빨갛게 물들어서 진해졌다. 결국 1600년대까지 네덜란드는 오렌지색 찾기를 포기하고 빨간색을 대신 썼다.

사프란
16세기 기록에 따르면 사프란은 따뜻한 밤, 달콤한 이슬, 비옥한 토양, 그리고 안개 낀 아침을 선호한다고 한다. 각 꽃뿐만 아니라 밭 전체가 하룻밤 새에 피고 질 수 있다. 꽃을 따서 암술을 떼어내는 작업은 수작업으로만 할 수 있다. 너무나도 섬세한 나머지 기계화 시도는 전부 실패했다. 31,800~45,500송이의 꽃에서 향신료가 고작 1파운드 나온다. 이런 까탈스러움을 감내할 수 있다면 사프란은 훌륭한 향신료다. 사프란은 최음제로 쓰였으며 치통부터 치석까지 치료하는 만병통치약이었다. 어떤 것과도 닮지 않고 향과 맛도 빼어나다. 달면서도 쓰고 향긋하며, 밀짚의 향기를 풍겼다가 이내 버섯처럼 숲의 냄새도 풍긴다.
또한 사프란은 색에서도 노란색과 오렌지색의 경계를 넘나들며 비슷하게 쓰인다. 무엇보다 승복에 쓰이는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 부처는 식물 염료로만 승복을 물들일 수 있다고 규정했지만 알다시피 사프란은 너무 비쌌다. 따라서 강황이나 바라밀을 대신썼다. 어쨌든 사프란은 옷과 머리에 강렬한 색깔을 들인다. 딱히 물이 빠지지도 않는다.

앰버(호박)
진짜 호박은 몇 안되는 유기 보석의 일종이며 아주 오래되었다. 오래전에 멸종된 삼나무의 일종 및 다른 침엽수부터 스며 나온 진액이 화석화되어 만들어진다. 완전히 화석화되지 않은 어린 호박은 코팔이라 일컫는다. 많은이들이 호박을 보면 영화 쥬라기 공원의 끈끈한 수지에 갇혀 있던 곤충으로부터 과학자가 DNA를추출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호박 속에 든 곤충을 종종 볼 수 있는데, 훌륭한 자연 방부제이기 때문인 것 같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호박의 위력을 알고 미라를 만들 때 썼다.

진저
생강과의 식물군은 부지런하다. 강황, 백두구, 생강 등이 한 가족이다. 길고 좁은 잎에 노란 꽃이 피고, 옅은 색의 뿌리 줄기가 땅 밑에 서ㅜㅁ어있는 바로 그 식물, 생강은 남아시아의 열대우림이 고향이며 1세기경 서양으로 처음 팔려나간 향신료 중 하나다. 그리고 여전히 인류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볶음부터 끈적거리는 진저브레드를 비롯한 모든 음식의 맛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맵고 자극적이면서도 입에 확 들어오는 이국적인 맛이다. 그리고 어떤 영문인지 이런 특성이 한 무리의 사람들과 얽힌다. 빨간머리 말이다.
블론드처럼 빨간머리는 소수자다. (그래서 당근대가리, 구리문손잡이, 오줌얼룩, 생강, 빨갱이 등 별 매력없는 별명이 붙는다) 북유럽 및 서유럽 이구의 6퍼센트 남짓, 그리고 스코틀랜드 인구의 13퍼센트가량이 빨간머리지만 세계 인구 전체를 따지만 2퍼센트 이하다.



스칼렛
스칼렛의 의미는 양극단에 놓여 있다. 고귀하고 위력있느 자를 위한 색이면서 처음부터 무고한 희생자를 위한 색이었다. 예를 들자면 이름조차 색이 아닌, 사랑받는 모직에 붙은 것이었다. 당시 가장 밝으면서도 바래거나 물이 빠지지 않던 염료인 연지벌레로 귀한 옷감을 종종 염색했기에 스칼렛은 14세기부터 색의 이름으로 사용되기 사작했다. 코치닐처럼 너무 작아서 씨앗이나 곡물과 혼동되는 벌레의 몸통으로 연지벌레 염료를 만든다. 서유럽에서 수입한 암컷 연지벌레 80마리로 염료 1그램을 만들 수 있었으므로 비쌀뿐더러 제대로 색을 뽑는 기술도 필요했다. 완성된 염료는 너무 밝고 물도 빠지지 않아 염색한 옷감은 사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바이올렛
1874년 파리에서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의 예술가 한 무리가 익명 모임을 결성하고는 첫 전시회를 준비했다. 그들은  이 전시회가 과업 강령이자 참여촉구, 그리고 무엇보다 매년 살룽에서 퇴짜를 놓는 보자르 예술학교를 향한 고귀한 모욕으로 작용하기를 원했다. 에드거 드가, 클로드 모네, 폴 세잔, 카미유 피사로 등이 창립 회원이었는데 이들은 오래되고 학구적인 예술스타일이 너무 칙칙하고 정체되었다고 여겼다. 또한 꿀색의 광택제를 발라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지 못하고 있으므로 가치가 없다고도 보았다. 보자르 예쑬학교 또한 인상파에게 가혹했다. <르 샤리바리>의 평가를 통해 루이스 르루아는 모네의 인상, 일출이 밑그림에 불과한 미완성작이라고 혹평했따. 이후 태동하는 경향을 향해 비슷한 비평이 줄을 이었으나 특히 한 가지 색을 향한 집착이 두드러졌다. 바로 바이올렛이다.
진작에 인상파를 칭송했던 에드몽 뒤랑티는 그들이 거의 언제나 보라색과 파란색 계통에서 시작한다고 평가했다. 다른 이들은 바이올렛의 발색을 더 싫어했다. 많은 이들은 인상파 예술가들이 완전히 미쳤거나 밝혀지지 않은 병에 시달린다고 결론을 내리고 ‘바이올레토마니아(보라색광)’라 이름 붙였다.
다른 이들은 인상주의자가 너무 야외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 탓은 아닐까 궁금해 했다. 밝은 실외의 풍경을 너무 오래 본 나머지 영원한 음각의 이미지가 새겨져 바이올렛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냐는 생각이었다.
인상파의 보라색 선호 현상을 두 가지의 새로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한 가지는 그림자가 절대로 검정색이나 회색이 아니라는 다른 색으로 이루어졌다는 인상파의 확신이다. 다른 한 가지는 보색이론이다. 햇빛 노란색의 보색이 바이올렛이므로 그림자의 색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바이올렛은 그림자의 역할조자 초월해버렸다. 1881년 에두아르 마네는 그의 친구에게 공기의 진짜 색을 발견했노라고 선언했다. 바이올렛이더군. 공기는 바이올렛이야. 3년뒤에도 세계는 여전히 바이올렛이겠지.


183. 파랑 계열
카탈루냐의 화가 조안 미로는 1920년대에 전작들과는 전혀 다른 경향의 그림을 선보였다. 그가 1925년 넓은 캔버스에 그린 peinture poesis(그림시)가운데 하나는 거의 완전히 공백이다. 왼쪽 위에만 빛photo이라는 단어가 우아하게 굽이치는 붓글씨로 쓰였다. 그리고 아래 오른쪽에는 물망초색 물감을 팝콘 모양으로 칠해놓고 깔끔하고도 드러나지 않는 글씨로 ceci est la coleur de ms reves 내 꿈속의 색이라 썼다.
이 작품이 발표되기 2년 전 눈먼 쥐를 연구하는 유전학자 클라이드 킬러는 미로의 변화를 설명해줄 수 있을 만한 발견을 했다. 포유동물이 빛을 인식할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광수용체가 없는 쥐도 빛에 반응한다는 요지였다. 당시에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75년이 지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따. 모두, 심지어 시력을 잃은 이조차도 파란빛을 감지 할 수 있게 해주는 특수 수용체 덕분이었다. 이른 낮에 가장 많이 나오는 파란빛은 우리가 밤에는 잠들고 낮에는 꺠어 있도록 생체 주기를 맞춰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에 굉장히 중요하다. 오늘날 부분 조명으로 밝힌 방이나 백라이트가 들어오는 스마트폰은 시기에 맞지 않은 파란빛이 나오기 떄문에 잠드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울트라 마린
색의 이름인 울트라 마린도 라틴어로 너머라는 뜻의 울트라와 바다라는 뜻의 마레mare에서왔다. 즉 먼거리에서 들여올 만한 색이라는 의미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이자 <미술의 책>의 저자인 첸니노 첸니니는 울트라마린을 걸출하고 아름다우면서도 가장 완벽한 모든색을 능가하는 색이다. 입에 담거나 허투루 쓴다면 가치가 바랠것이다라고 쓴 바있다.
울트라마린의 이야기는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청금석(라피스 라줄리 라틴어로 파란색 돌)은 오늘날에는 중국이나 칠레 같은 나라에서 채굴한다. 그러나 18세기 이전 서양의 울트라마린을 책임지던 진하고 깊은 밤의 색을 띤 바위의 거의 대부분은 한 군데서 나온 것이었다. 바로 바미얀에서 북동쪽으로 600킬로미터 떨어진 산골짜기의 사리상 광산으로 파괴된 불상처럼 광산도 유명했다.

프러시안 블루
프러시안 블루는 윌리엄 호가스, 존 컨스터블, 반 고흐나 모네 등의 여러 화가가 썼다. 일본의 화가와 목공 또한 프러시안 블루를 선호했다. 또한 20세기 초 피카소가 친구의 죽음 이후 거쳤던 청색시대에 선호했던 안료였다. 그의 울적한 작품 환경에 프러시안 블루의 투명함이 차가운 깊이를 불어넣었기 떄문이다. 물론 오늘 날에도 많이 쓰인다. 아니쉬 카푸어는 1990년작인 사물 한가운데의 날개를 프러시안 블루를 입힌 함석으로 만들었다.
프러시안 블루의 영향력은 다른 산업으로도 퍼져나갔다. 벽지, 주택용 물간, 섬유 염색에 쓰인지 오래다. 19세기의 화학자이자 점성술사이며 사진가인 존 허셜은 감광지와 함께 쓰는 복사기술을 고안해냈다. 덕분에 오늘날 기술적인 도면을 일컫는 파란색 배경에 흰 자국을 남기는 ‘청사진’이 탄생했다. 또한 프러시안 블루는 탈륨이나 방사능 세슘의 체내 흡수를 막아 치료제로도 쓰인다. 오로지 눈에 확 들어오는 파란색이 단점이다. 놀랍게도 아무도 프러시안 블루의 실체를 여태껏 밝히지 못했다. 제조법을 따라 만들면서도 반응의 세부상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파란색 결정인 페로시안화철은 복잡한 분자구조의 복합 화합물이다. 그래서 프러시안 불루는 거의 기적에 가깝도록 우연적인 과정을 거쳐 탄생한 색이다.

일렉트릭 블루
일렉트릭 블루는 현대성의 상징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최신의 전기 기술 혁신이 연구실과 공장을 비롯한 말쑥한 호텔이나 개인 주택까지 흘러들어갔으니 미래와 현재가 융합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사이의 잠깐을 제외하면 일렉트릭 블루는 과학이 통제하는 운명의 상상을 지배해왔다. 1999년에 개봉한 영화 매트릭스는 단색모니터로부터 새어나오는 으스스한 녹색의 빛으로 넘쳐나지만 고작 3년 뒤에 개봉한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기술은 일렉트릭 블루로 가동된다.


219. 초록계열
서양에서는 12세기부터 녹색이 악마 또는 악한 생물과 시작적으로 얽혔는데 녹색을 신성하게 여기는 무슬림과 십자군이나 기독교사이의 고조되는 적대감때문이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시대에 녹색의상은 무대에서 불운을 불러일으킨다고 여겨졌다. 예를 들어 1847년 프랑스의 저자는 코메디프랑세즈에서 작품을 내리겠다고 위협했는데 여배우가 무대의상으로 설정된 녹색옷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녹색을 향한 비이성적인 불호의 마지막 어록은 바실리 카딘스키의 몫일 것이다. 그는 절대적인 녹색은 가장 강한 마비를 불러일으키는 색이다. 엄청나게 건강해 바닥에 누워 되새김질이나 하면서 멍청하고 표정없는 눈으로 세상을 사색하는 뚱뚱한 소와 같다고 썼다.


압생트
19세기 말엽 녹색 위협이 유럽을 휩쓸고 지나갔다. 약쑥, 팔각, 회향, 야생 마조람 등의 식물 및 향신채를 짓이긴 뒤 알코올에 담갔다가 증류해 마든 서양배 색에 쓴맛ㅇ르 지닌 리큐르인 압생트말이다.
1860년대부터 싼 곡물 알코올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곧 압생트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처음에는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오스카 와일드, 에드거 앨런 포처럼 방종한 보헤미안이나 예술가의 술이라 여겼지만 금세 인기가 퍼져나갔다. 1870년대까지 압생트는 한 잔에 와인보다 훨씬싼 10상팀이었으며 아페리티프(저녁식사전에 마시는 소량의 식전주)소비의 90퍼센트를 차지했다. 19세기 후반 파리에서는 오후 5~6시 사이에 희미한 허브향을 맡을 수 있었으니 이 시간대를 Iheure verte(녹색의 시간)이라 일컬었다.

에메랄드
셰익스피어는 녹색과 질투의 관계를 규정한 장본인이다.
1590년대 말에 쓴 베니스의 상인에서 그는 녹색눈의 질투를 언급했으며 1603년 작품인 오셀로에서는 이아고를 조롱하는 녹색눈의 괴물/고기를 먹는다고 표현했다.
에메랄드는 녹주석 일가의 귀하고 연약한 보석으로 크로미움과 바나디움같은 원소 소량 덕분에 녹색을 띤다. 파키스탄, 인도, 잠비아, 그리고 남아메리카의 일부 지역이 주요 산지다.
1900년 오즈의 마법사를 쓴 L.프랭크 바움은 에메랄드를 주인공과 친구들의 목적지인 도시의 이름 및 건물 마감재로 설정했따. 적어도 책의 도입부에서는 에메랄드 시가 마법적인 꿈의 실현을 의미했다.


카키
우르두어에서 가져온 카키(흙이라는 뜻)라는 단어는 특히 흙색의 군복을 일컫는 데 쓰여왔다.
흰 면을 끊어와 지역 강의 진흙에 담그고 비빈 뒤 튜닉과 바지를 지으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 과정을 통해 흙의 땅에서 병사들이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결과는 혁신적이었다. 조직적인 군의 역사상 최초로 군인이 두드러지기는커녕 반대로 환경에 묻어나는 제복이 고안된 것이다.
1857년 여름에 벌어진 세포이 항쟁에 크게 힘입어 카키는 금방 유행으로 퍼져나갔다.
몇 천년동안 용사는 상대를 겁주기 위해 눈을 확 사로잡는 복식을 차려입었다. 로마군의 빨간망토, 러시아 황제 경호단의 에메랄드 및 실버 재킷은 개인은 물론이고 병력을 실제보다 더 커보이게 만들었으며 포연으로 자욱한 전장에서 피아식별을 도와주었다. 하지만 20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섬세한 항공정찰이 증가했으니 무연총의 발명과 더불어 눈에 잘띄는 병력이 치명적으로 전세에 불리해지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세피아
세피아 오피시날리스, 즉 갑오징어를 놀라게 하고 싶다면 일단 찾는 것부터가 일이다. 위장술이 워낙 뛰어나기 떄문이다. 설사 찾더라도 짙은 액체의 빽뺵한 연막에 갑자기 둘러싸이거나 가짜오징어를 맞닥뜨릴 수있다. 먹물과 점액으로 이루어진 가짜 말이다. 사이를 틈타 세피아 오피시날리스는 도망갈테니, 허탕치는 것이다.
문어, 오징어, 갑오징어를 포함한 두족류 무리는 먹물을 만들어낸다. 태운 커피 브라운의 액체는 거의 모든 성분이 멜라닌이며 발색력이 뛰어나다. 요즘은 오징어 먹물이 해산물 리소토에 까마귀의 날개처럼 반짝이는 검정색을 불어 넣지만 세피아(갑오징어의 먹물)는 오랫동안 작가와 화가의안료로 쓰였다.
두족류에서 잉크를 추출하는 방법은 널렸지만 가장 흔히 쓰는 방법은 먹물주머니를 떼어내고 말리고 가루를 내어 강염기성 액체에 끓여 염료를 추출하는 방식이다. 중화를 시킨 뒤에는 헹궈서 말린 뒤 빻아 덩어리로 빚어 판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난색 세피아로 스케치를 즐겨 그렸고 상당수가 현재까지 보전되었다.
요즘도 많은 화가가 뒤에 깔린 노회한 빨간색을 선호하고 여전히 중요하게 여기지만 세피아는 사진의 세계에서 더욱 많이 쓰인다. 원래 세피아는 은백계 인쇄물인 사진의 은을 더 안정적인 화합물로 대체하기 위한 화학처리의 결과로 나타난, 오래도록 바래지 않으며 따뜻한 오커의 향연을 머금은 색조를 의미했다.


267. 검정계열
진짜 검정색은 어떤 빛도 반사하지 않으니 모든 파장을 똑같이 반사하는 흰색의 정반대 상태다. 감정적인 측면에서는 이런 사실이 검정색을 경험하거나 쓰는 데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실용적인 차원에서 따지면 모든 빛을 흡수하는 검정색은 찾을 수도 만들어낼 수도 없음이 증명됐다. 2014년 영국에서 카본 나노튜브 기술로 만들어낸 반타블랙은 스펙트럼의 99.965퍼센트를 흡수해 세상에서 가장 검은 물질의 자리에 올랐다. 직접 보면 너무나도 까만 나머지 눈과 뇌를 속여 깊이와 질감을 인식할 수 없는 검정색이다.

잉크
기원전 2600년경 고대 이집트의 5대째 고관이었던 프타호텝은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다. 은퇴이유는 고령으로 나이많은 친척이 있는 이라면 누구라도 친술할 이유였다. ‘밤에 잠을 잘 수가 없다/ 시야는 흐려지고 귀는 먹어온다/ 입은 스스로 다무니 말을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사정을 몇 줄 늘어놓은 뒤 그느 아들에게 감동적인 충고를 남기기 시작한다. ‘지식에 우쭐하지마라/ 하지만 현명한 이는 물론 무지한 이와도 토의하라/ 예술에는 한계가 없다/ 재능을 완전히 성취하는 예술가는 없다’ 그의 아들은 이후 고관에 취임했으니 좋은 충고였던 것 같다. 그는 완전히 읽을 수 있는 검정색 잉크로 파피루스에 기록을 남겼기에 오늘날의 인류는 프타호텝과 그의 상처 및 고통은 물론 아들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사용한 것은 초나 등잔에 불을 붙이는 데 쓰느 그을음으로 쉽게 만들 수 있는 아주 고운 안료로 만든 잉크였다. 그을음의 입자가 뭉치지 않고 물에 잘 퍼질 수 있도록 물과 아라비아고무를 더해서 만들었다.